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 제5편: 죽음을 앞둔 환자의 부정 심리 사례(2)

2011. 3. 5. 18:43나의 의학소고

 우리 님들 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 다섯 번째로 부정 심리에 대한 것입니다. 역시 사례를 들어 죽음을 앞둔 환자의 부정 심리를 살펴보겠습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환자가 알고 있으면서도 자신은 아주 건강하다고 믿는 심리가 곧 부정입니다.
이 글도 '환자와의 대화'의 내용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우리 님들도 즐겁게 감상해보시고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



                                                                 제5편



                             죽음을 앞둔 환자의 부정 심리 사례(2)


                                              

 

 

 


 

   

  
사례 3

 

 나는 허름한 양로원에 누워있는 어느 친척 노인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양로원 자체가 마치 죽음의 길만 같아 보였습니다. 시설이나 환경이 너무나도 지저분했으니까요. 방안에 짙게 밴 대변이나 소변 냄새가 마치 죽음의 냄새처럼 느껴졌습니다.

 현관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당장 돌아가고 싶었고, 겨우 그 환자를 찾았을 때는 한시바삐 빠져나갈 궁리만 했습니다. 오래전에 만났을 때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내가 인사를 하자 그 분도 처음엔 반가워했으나 이도 잠시 뿐, 곧 어색해하고 당황해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 노인 역시 나 못지않게 불안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앉을 의자를 찾느라 두리번거리는 나를 쳐다보던 그 노인은 방도 더럽고, 자기도 이렇게 추한 꼴을 하고서는 더 이상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침대 옆에 그냥 서있기만 했습니다. 그러자 그 분은 내 손을 잡더니 “제발 돌아가 줘요.”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말했습니다. 그래서 나는 그 방을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몇 년이 흐른 지금도 나는 그 환자의 ‘제발 돌아가 달라’는 말이 무슨 의미였는지 확실히 모릅니다. 정말 내가 가주기를 원했던 것일까요? 아니면 내가 그 환자의 처참한 몰골에도 불구하고 더 있어 주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그도 아니면 내게 빠져나갈 기회를 준 것은 아니었을까요?

 분명한 것은 그 환자가 제발 가달라고 해주기를 기다리기나 한 듯 나는 그 곳을 벗어났으며, 오늘도 똑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역시 그렇게 행동할 지도 모른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러한 환경에서 방문객을 맞는다는 자체가 창피하기 때문에 자신을 격리시키게 된 결과가 되었을 것입니다. 환자에 따라선 지나친 당혹감으로 인해 결국 자기 자신을 격리시켜 버릴 수도 있습니다. 환자는 이런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때로는 죽음 자체를 부정한다고 추측할 수 있습니다.

 최근에 위의 경우와는 다른 경험을 한 적이 있는데, 환자가 자신을 부끄러워하는 점에서는 유사했습니다.

                             

 

 

 

 


  
  사례 4

 

 임종에 가까운 한 남자 환자를 일주일에 두 번씩 5개월 동안 방문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찾아갈 때마다 자기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는 것에 놀라워했습니다. 그는 흥미롭게 이야기를 하다가도 자꾸만 지루하지 않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던 말을 멈추고 갑자기 스스로를 탓할 때도 많았습니다. 예를 든다면 조금 전 자기가 한 말은 전혀 중요하지도 않고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더군요. 그리고는 이 모든 것이 자기 병 때문이라고 한탄하며, 이제 자신에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말하곤 했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을 주먹으로 때리기까지 했었지요. 모든 말과 행동이 자신은 이젠 형편없고 부끄러울 뿐이라는 것을 냉혹하게 말해주는 셈이 되었습니다.   
 이러니 나 같은 방문객이 기분 좋을 리가 없었죠. 침울하고 불쾌한 감정이 점점 쌓였고, 그 환자의 말처럼 더 이상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생각마저 들기 시작했습니다.
 환자의 이런 태도는 찾아오는 사람이 빨리 가주기를 재촉하며 문을 열고서 기다리는 꼴이었습니다. 나도 예외는 아니어서 그 환자를 방문하는 것이 점점 내키지 않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환자는 나에게 자기를 계속해서 찾아오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이냐고 단도직입적으로 묻더군요. 내가 친구로서 또는 의사로서 계속 오는 것인지, 아니면 그의 주치의가 우울증에 빠진 환자니까 살펴보라고 해서 온 것인지 알고 싶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습니다. 그래서 가능한 한 사실대로 말하려고 했지요.

 그 환자의 주치의가 보낸 것은 아니고, 주치의가 우울해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건 나도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며, 환자 자신도 스스로 의식하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습니다. 덧붙여 내가 그 환자를 담당한 의사는 아니지만 병중에 있는 친구이기 때문에 찾아오는 것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물론 내가 그를 안쓰러워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의 감정을 상하게 할까 봐 이야기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에 그치지 않고 그가 찾아오는 문병객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지 내가 느낀 바를 말해 주었습니다. 그 자신이 애써 찾아와 주는 사람을 함부로 대하며 몰아내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반발하며 자기는 그런 적이 없으며 자기가 형편없이 되어 찾아올 가치가 없기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나는 그가 틀렸다고 말하고서 찾아오는 사람을 서둘러 돌려보냈던 그의 행동을 구체적인 예를 들어가며 제시했습니다. 그러자 그는 나에게 당신은 왜 이렇게 오래 있느냐고 되묻는 것이었습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하며, 아마도 그에게는 누가 뭐래도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 줄 친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또한 내 자신이 당신을 방문하는 것을 좋아하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또한 그의 만류에도 개의치 않고 계속 찾아와서 오래 앉아 이야기하다 보니, 더욱 깊이 있고 중요한 이야기도 나누게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듣더니 그 환자도 동의하더군요. 그도 역시 시간이 흐르고 방문이 되풀이되니 자신의 일생, 가족, 일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생각까지 점점 더 솔직하게 이야기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이 환자의 경우는 죽음을 부정하고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그 환자도 가까이 다가온 죽음을 직접 언급하는 일도 없었고, 때때로 미래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보아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것 같기는 했지만 적극적이지는 못했습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탓하고 부끄러워하며 찾아오는 사람이 있으면 어색해하는 것으로 보아 죽음에 직면하는 부담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던 듯합니다. 그 환자 같이 자존심이 강하고 독립적이고 남의 도움받기를 꺼리는 사람이 병들어 할 수 없이 남에게 의존해야만 하고, 자기 한 몸 주체하기도 어려우며, 더욱이 보는 사람마다 가엾게 여기는 현실을 참기란 마치 고문을 당하는 것 같았을 것입니다.

 따라서 병이 깊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의 변화도 유난히 창피하고 때로는 참을 수가 없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이루지 못한 일이나 이제는 소용없게 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 절망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이런 상태에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없었던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이 환자는 아직도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이야기도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다른 환자의 경우라면 아마도 죽음을 부정하여 그러한 갈등들을 해결하지 않았을까 여겨집니다.
 죽음을 부정할 수만 있어도 스스로의 상황을 그렇게 창피하게 생각하지 않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날 수도, 찾아와 준 데 대해 감사를 표시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환자들이 죽음을 부정하는 데는 여러 가지 특이한 이유들이 있기 마련이므로, 환자의 그러한 노력을 좌절시키는 문제는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합니다.
                                       
 부정의 심리는 참으로 묘합니다. 현실적인 불행을 심리적으로 완전히 부정할 수 있으면 우선 얼마 동안은 편해지지만, 다시 불행의 아픔은 되살아납니다. 이 정도는 누구나 잘 알고 있지만, 이 부정의 심리가 어떻게, 또 왜 작용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습니다. 의사라면 이런 것에 대해서 알고 있어야 환자와 성공적인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부정하는 심리는 환자 자신이 완전히 의식하지 못한 채, 의도적으로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 특징입니다. 이러한 무의식적인 산물인 부정심리는 불행을 알면서도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행동하려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죽음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는 아주 건강하다고 믿는 심리가 곧 부정입니다. 이러한 심리적 부정이 잘 성립되면 자기는 죽지 않는다고 믿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이 부정의 묘한 심리입니다. 그는 단지 알고 싶어 하지 않을 뿐입니다. 마치 가족 중에 창피한 일을 당했을 때나, 사업에 실패한 가장이 아무 일 없는 듯 가정에 돌아와 여느 때처럼 즐거워하는 그러한 심리와 같은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가족 중 한 사람이 횡령이나 강간으로 체포되는 부끄러운 일을 당했을 때, 가문의 명예를 중요시하는 집안사람들은 그 치욕스러운 사건에 대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오히려 웃으며 평소처럼 행동하려 합니다.

 이런 부정의 심리는 어느 환자에게든 조금은 작용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다가올 아픔이나 절망, 그리고 죽음을 의식하지 않은 채, 쓰라리고 암담한 최후의 진실에 굴복하지 않으려고 합니다. 그리고는 평상시처럼 장래의 계획을 세우기도 합니다.

 어느 정도 자신에게 닥쳐올 사실을 인식하고 있을 때에만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임종에 가까운 환자를 지켜보며 우리가 궁금한 것 중의 하나는, 저 사람이 그러한 사실을 알고 있을까 아니면 아직 모를까 하는 점입니다. 그것을 알아내기는 쉽습니다. 환자가 죽음에 대해 일체 이야기하지 않으면 이는 분명히 죽음을 의식하고 있다는 증거요, 나아가서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 환자는 죽음 앞에 어쩔 수 없는 자신을 이미 받아들였다는 의미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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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이제 죽음을 앞둔 환자의 부정 심리를 약간은 이해하시겠죠?
임종 직전 환자의 심리 상태를 이해해야만 우리가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 알아낼 수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이런 환자가 어른인가 어린이인가에 따라 나타나는 부정 심리가 다를 수도 있습니다.
다음엔 어린이의 경우를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님들 오늘도 보람찬 하루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