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3. 5. 18:45ㆍ나의 의학소고
우리 님들 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 여섯 번째로 이번엔 환자의 가족이나 담당의사의 부정 심리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이러한 부정 심리가 가족에게 생긴다면 환자는 극심한 고통을 당할 수밖에 없는데, 담당 의사까지 부정심리가 생기면 더욱더 힘들어질 것입니다.
우리 님들 사례를 잘 보시면 그 이유를 아시게 될 겁니다.
다소 의학적인 내용이 많아 이해가 힘드시더라도 끝까지 읽어보신다면
많은 도움이 되실 것입니다.
죽음을 앞둔 환자 이야기
제6편
죽음을 앞둔 환자 가족의 부정심리 사례
부정의 심리는 환자에게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이나 심지어 의사까지도 환자의 죽음을 부정할 수 있습니다. 환자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고 난 가족들도 무의식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게 되어, 환자가 죽는 일 따위는 없다고 믿어 버립니다.
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의사에게도 이런 경우는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환자는 죽음을 심리적으로 부정할 수 없게 되고, 따라서 아주 불안하게 됩니다. 자기는 죽음을 예감하고 있는데 자기를 걱정해줄 가족들이 오히려 아무렇지 않게 대한다면, 죽음의 길을 혼자 가야하는 두려움이 옵니다. 이와 같이 부정의 심리는 묘한 것이어서, 주위 사람들이 부정을 하지 않을 때에만 잘 작용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환자는 임종이 가까우면 자신을 주체하기도 힘들고, 가족의 도움 없이는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죽는다는 것은 포기를 강요당하는 상태이므로, 환자는 죽을 때까지 잘 돌봐주기를 원합니다. 만일 환자가 가족이나 의사까지도 자기가 죽는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극도의 불안과 공포에 휩싸이게 됩니다. 즉 죽음의 길을 혼자서 가야 하니 두려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죽어가는 환자가 어린이일 경우에는 부모들의 부정심리는 더욱 강해집니다. 자식이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엄청난 충격이므로, 임박하고 있는 죽음을 믿지 않음으로써 감정 상태를 다소나마 보호해야만 할 것입니다. 이렇게 해야만 하는 부모의 심정을 이해할 수는 있지만, 이 경우에 죽음을 앞둔 어린이는 더욱 힘들어집니다. 부모가 죽음을 부정하고 있으니, 혼자서 죽음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례 5
죽음을 앞둔 열 살 난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린이 자신도 자꾸만 여위어가는 것을 의식하고 불안해했습니다. 그는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행여 죽는 건 아닌가,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 왜 죽어야 하는가, 왜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가, 등을 물었습니다.
가족이나 의사들도 괴롭고 소년이 안쓰럽기도 하여, 그의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였습니다. 이제 곧 나을 것이고 머지않아 회복되면 학교에 갈 수 있을 것이라며 책을 사주기도 했습니다.
아이가 어쩌다가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그들은 오히려 화를 내며 꾸짖기까지 했습니다. 그런 상황에 닥친 부모들이 으레 그렇듯이 그가 좋아하는 음식, 듣고 싶어 하는 음악, 읽고 싶은 책, 갖고 싶어 하는 장난감 등 아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사주었습니다.
점쟁이도 부르고, 무당굿도 하고, 온갖 미신적인 괴상한 짓까지 소년에게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 다 해 보았습니다. 과히 죽음을 부정하기 위한 광적인 심리상태였습니다. 무엇인가 좀 더 도움이 되는 것을 해달라며 의사까지도 못살게 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젠 아이나 가족, 그리고 의사도 완전히 기진맥진해버렸습니다. 결국 이 의사는 부모들의 혼란한 감정 상태와 소년의 점점 커져가는 공포를 보다 못해 정신과 의사의 도움을 청하게 되었습니다.
정신과 의사가 도움이 될 수 있었던 큰 이유는 그 상황에 직접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사실상 제 정신이 아닐 정도로 감정이 고조되고, 불행이 겹친 상황에서는 외부인의 조언을 구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입니다. 외부인의 감정이나 생각은 그러한 심각하고 두려운 상황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정신과 의사의 경우 그 소년이나 부모를 전혀 모르고 있고, 담당 의사도 안면이나 있는 정도였으므로, 그나마 상황을 객관적으로 파악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정신과 의사도 그러한 내용을 알고서 감정적 동요가 일어났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처음엔 그 담당의사의 부탁을 거절할까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일에 정신과 의사까지 휘말려들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들도 정신과 의사가 느낀 이런 반응과 똑같은 심경에서 저렇게 되었으려니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정신과의사는 몇 가지 추측을 해보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도피하고 싶은 나머지 소년이 죽음에 직면해있다는 것을 부정하고, 어디엔가 생명을 구할 방도가 있다고 믿게 된 때문이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부정함으로써 일단 그가 죽는다는 불가피한 사실을 직면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이고, 이렇듯 부모나 의사가 상황을 직시하지 못하고서 부정만 하고 있으니 소년 자신은 혼자서 계속 불안해 해야만 했을 것이다.'
이러한 정신과의사의 추측이 맞는다면, 우선 주치의와 대화를 한 후에 부모, 그리고 필요한 경우 소년과 이야기를 나누어야만 될 것 같았습니다. 정신과의사가 그 주치의에게 "아직도 희망을 버리지 않고 무슨 기적이라도 바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을 때 주치의는 정신과의사더러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인간"이라고 하면서 "정신과의사를 만난 것이 후회된다."고 말했습니다. 이런 말이 정신과의사의 기분을 건드리기는 했지만 오히려 정신과의사가 생각한 것이 틀림없다는 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한동안 정신과의사는 화가 난 주치의와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었습니다. 한참 후 주치의는 눈물을 글썽거리며, "그 귀여운 애가 죽는다니 믿을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는 얼마 전에 죽은 두 아이 이야기를 하면서 그간 견디기 어려웠던 심경을 토로하는 것이었습니다. 또다시 "이 아이의 죽음을 보느니 차라리 소아과의사를 그만두어야겠다."고 다짐하듯 말하기도 했습니다. 주치의는 한참동안을 감정에 북받혀 의사로서, 인간으로서 죽음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말하더니, 이 아이 문제만 해도 자기는 현대의학에 회의를 느낀 나머지 보호자가 하자는 대로 푸닥거리를 하게 내버려두었고, 자신이 그렇게 비현실적으로 변한 것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말했습니다.
이제 정신과의사가 할 일은 이 담당의사와의 대화만으로도 충분했습니다. 주치의가 환자의 죽음을 인정한 이상, 다시 침착한 의사로 되돌아갈 수가 있게 되었으니까. 이제 주치의는 환자의 부모가 죽음을 부정하고 있는 현실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고, 나아가 이런 상황이 죽음을 앞둔 소년에게 끼치는 영향도 점차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주치의는 그 이후로 여러 차례 환자의 부모를 만났고, 환자와도 대화를 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이전보다 더 동요되었지만 그것은 잠시뿐이었고, 이제 그들은 죽음을 부정하기 위해 우왕좌왕하던 때와는 달리 한결 차분해졌습니다. 그들의 표정에는 슬픔이 역력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슬픔은 적절한 감정의 표현임에 틀림없었습니다.
이렇게 환자 주변 인물들의 감정상태가 안정궤도에 접어들자, 소년에게도 그 영향이 미치기 시작했습니다. 이전처럼 여러 가지를 끊임없이 캐묻는 대신, 훨씬 안정된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에게 애정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이제 모든 사람들은 당황해서 안절부절못하는 대신 진한 슬픔까지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는 꼭 필요한 것들이었고, 의사의 계속적인 관심으로 인해 부모들 역시 더 이상 죽음을 부정하는 일은 없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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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이제 담당의사나 환자 보호자의 부정 심리가 환자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아시겠지요?
다음편엔 죽음을 앞둔 환자의 가족이 느끼는 부정심리 이외에 좀 더 복잡한 심리적 반응인 생존자 반응에 대해서 언급하겠습니다.
갈수록 뭐가 뭔지 모르겠고 복잡하다구요? 사례를 들어가며 설명하므로 별로 복잡하지는 않습니다.
우리 님들 오늘도 즐거운 하루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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