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가지의 글!... 3.1운동 숨은 이야기와 벤쿠버 영웅/곁에서 뵌 법정스님

2011. 11. 11. 11:18화석·청천리님 방

 

세가지의 글!... 3.1운동 숨은 이야기와 벤쿠버 영웅/곁에서 뵌 법정스님

2010.03.02 04:56 | 님들의 휴게실 | 화석

http://kr.blog.yahoo.com/goran5006/1842 

 


     ▼ 먼저 클릭하시고...

    코리아나 - 손에 손잡고 (1988, HAND IN HAND)

     올림픽 전후를 기해서 전세계적으로 약 1600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
     말이 필요없다 자랑스런 대한민국
 



   

 

     
   
  오늘은 요약본 들어 갑니다.

   
1. 체코슬로바키아가 한국의 3·1운동에 크나큰 기여를...
     
 - 청산리전투의 승리 공신은 체코군 무기

    2. 3·1운동 영웅들 있었기에 밴쿠버의 영웅이... 이어령님 글!
      - 나라
잃은 유관순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탄생한다면 김연아가 되었을 것이고,
        대한민국의 김연아가 100년 전 망국의 땅에 태어났더라면 유관순의 이름으로
        기억되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데뷔할 무렵 연아는 주니어전에서도 시니어전에서도 패배를 당하고 일기장에
       “왜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가”라며 마오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벽을 넘어서’의 대본을 만들던 일을 상기!
        김연아가 세계의 빙판 위에 그린 꿈과 메시지도 ‘벽을 넘어서’였다.

    3. 그간 법정스님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한 이웃님의 답글입니다. 

    
  - 이런 글이 필요했습니다. 이젠 스토리텔링 시대라... 마냥 누가 좋다고만 할 
        시대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주위를 감동시킬 필요가 있는 시대...

        하지만 그 누구도 이렇게 5일간 올린 글에 대해... 첫날 화낸 분들... 그리고
        마지막날 저에게 섭섭했다는 분들... 많았습니다만, 이렇게 본인의 경험을
        구체적으로 답하기에 새로운 측면에서의 고찰이 가능합니다. 

        이제 세월이 지나 법정스님도 옛날 같지는 않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참으로 새롭게 느껴지는 구체적인 이야기입니다. 제가 시간나면 인터넷을
        모두 뒤져도 찾을 수 없는 살아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블로그에서는 건성이 아닌 구체적인 진심으로의 오가는 답글에서
        그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경험을 주고 받을 수 있음을 느끼며 그 분의 답글...
        전문을 게재합니다. 감사합니다. 새로운 이해와 경험과 느낌을 주심에...


1. 체코슬로바키아가 한국의 3·1운동에 크나큰 기여를...

   
    ‘서울의 봉기’ 블라디보스토크, 3월 6일.

   한국인들이 대규모 시위를 벌이며 한국의 독립을 요구했다고 서울발 로이터통신이 보도
   했다. 시위 군중은 황제의 시신이 안치된 왕궁까지 행진했다. 서울 거리는 국장(國葬)에
   참석하기 위해 지방에서 올라온 사람들로 혼잡했다. 경찰과 군은 봉기가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여러가지 조치를 취했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18일자(제331호), 노보니콜라예브스크에서 인쇄

  
3·1독립운동이 일어난 지 17일이 지난 3월 18일,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실린 보도 내용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군대의 신문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로이터통신의 블라디보스토크발(發) 3월 6일 뉴스를 토대로 이 기사를 작성했다.

   3·1독립운동이 중국, 미국, 터키 언론에 보도되었다는 사실은 언론학자들에 의해 밝혀졌지
   만 체코슬로바키아 신문이 3·1독립운동을 보도했다는 사실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다.
   이 같은 사실은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Jaroslav olsa jr)가 개인적으로 소장
   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를 주간조선에 공개하면서 밝혀졌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와 3·1독립운동 관련기사.

    이 신문이 두 번째로 한국의 3·1독립운동을 보도한 것은 첫 번째 보도가 나가고 열흘 뒤
    였다. 
‘일본과 한국의 운동’ 만주, 3월 22일.

    일본의 조선총독은 “한국은 일본 통치 아래에 남을 것이며 한국의 국익은 존중받게 될 것”
    이라고 밝혔다. 조선총독은 “역사가 보여주듯 한국은 스스로 혼자서는 문명화될 수 없으며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서 “한국은 인접한 강대국의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어야 하며 한국은 일본의 영향력 속에서 큰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말했다.

    감옥에 수감된 1000명의 한국인 중에서 600명 이상이 석방되었고, 나머지는 현재 조사를
    받고 있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3월 28일자(제340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

    세 번째 보도가 나간 것은 두 번째 보도가 나간 지 46일 만이었다.  
   
‘한국에서’ 블라디보스토크, 4월 7일

    한국의 수도 서울에서 일본 경찰은 혁명 잡지를 인쇄한 비밀 인쇄시설을 찾아냈다.
    모든 인쇄기계는 즉각 군법회의에 귀속됐다. 도쿄발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일본 당국은
    무력으로 한국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것으로 보인다. 2000명의 한국 노동자가 무자비하게
    검거되었고 그중 절반은 재판에 회부된다. 
     -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1919년 5월 13일(제377호), 이르쿠츠크에서 인쇄

    독자들은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데일리)가 인쇄된 장소에 대해 의문을 가질 것이다. 
    왜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인쇄 장소가 체코슬로바키아가 아닌 러시아였을까?
    러시아에서도 왜 인쇄처가 날짜별로 다를까 하는 의문이다.

    무소속 부대로 전락한 체코 망명군대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에 의해
    창간되었다. 1917년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여전히 오스트리아 제국의 식민지에 놓여있을
    시점.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대전이 일어나자 오스트리아를 위해 싸우기를
    거부한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이 1916년 러시아에서 창설한 군부대.

    체코슬로바키아 망명 군대는 1차세계대전 중 연합국(영국·프랑스) 편인 제정(帝政)
    러시아군대의 일원으로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전투를 벌였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6만명 규모.


     


    
열차로 이동 중인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이 군대는 이동 중에 전투를 벌이고 신문을 발행했다. / photo 주한체코대사관


    1차 세계대전 중인 1917년 러시아의 정치상황은 복잡했다. 1917년 10월 볼셰비키 공산
    혁명이 성공하면서 제정 러시아가 붕괴됐다. 러시아 전역은 적군(赤軍)의 수중에 하나씩
    떨어지고 있었고 또 외국군대가 러시아에 속속 상륙하면서 상황은 혼미해졌다.

    우크라이나 지방에서 활동하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졸지에 ‘무소속 부대’로 전락했다.
    이에 미국에 본부를 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프랑스 측과 협의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프랑스군에 배속시킨다.

    문제는 우크라이나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어떻게 프랑스 전선으로 이동시키느냐 하는
    것. 우크라이나 서쪽은 볼셰비키 적군에 의해 완전 장악된 상태였다. 거리상으로는 서쪽
    으로 가는 게 가까웠으나 그것은 볼셰비키 적군의 심장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았다.

    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로
    우회시키기로 결정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무장을 해제하라는 소비에트정부의 경고
    에도 불구하고 중무장한 상태로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올샤 대사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동하면서 반(反)
    볼셰비키 전투를 벌이기 시작했다”면서 “러시아 서쪽에서 극동의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에 전투를 하면서 신문을 편집 인쇄해 배포했다”고 말했다.

    1919년 3월 13일자 이 신문은 아무르강 지방의 볼셰비키와 일본군의 움직임을 다루고
    있다. 이날자 신문은 옴스크(Omsk)에서 인쇄되었다. 옴스크는 시베리아 한복판에 있는
    도시다. 이후 신문은 동시베리아 노보니콜라예브스크(Novonikolayevsk)에서 발행되었고
    다시 바이칼호 인근 도시인 이르쿠츠크(Irkutsk)에서 찍는다.

    신문의 인쇄처가 옴스크→노보니콜라예브스크→이르쿠츠크로 바뀌고 있다는 것은 체코
    슬로바키아 군대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블라디보스토크, 체코와 한국의 첫 만남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제1진(약 1만5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 시베리아횡단철도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것은 1918년 4월 말. 소비에트정권이 극동 러시아까지
    장악한 상태였지만 망명군대는 별다른 어려움 없이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 도착했다.
    배편을 이용해 프랑스로 이동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시차를 두고 속속 시베리아에서 극동 러시아의 부동항(不凍港)
    으로 집결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1918년 4월부터 1920년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
    대기하며 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사이 1918년 10월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
    트리아로부터 독립했고 망명군대의 최종 목적지는 프랑스 전선이 아닌 막 탄생한 체코슬
    로바키아민주공화국이 됐다.

    역사적으로 아무런 교류가 없던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의 첫 접촉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뤄졌다. 1918년이면 이미 러시아 연해주와 간도지방에 많은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던
    시점. 간도는 당시 한국인 약 100만명이 거주하고 있어 해외 독립운동의 주요 거점이었다.

    한국·체코 접촉과 관련된 연구는 체코에서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프라하의 역사학자 즈덴
    카 클로슬로바(Zdenka Klosl쮤v쮅)는 2002년과 2003년 프라하에서 발행된 계간지 ‘아시
    아와 아프리카 연구’에 ‘러시아의 체코 군대와 한국 독립운동’과 ‘한국독립투사에 들어간
    체코무기’를 각각 게재했다.

    클로슬로바는 체코 기록보관소의 자료와 러시아 측 자료를 수집했다. 여기에 한국 측 자료
    로 역사학자 신용하의 ‘북로군정서 항일 민족독립운동사 연구’와 ‘한국근대 민족운동사
    연구’, 역사학자 박용석의 ‘일제하 만주·노령 지역에서의 독립군의 연구’, 이기백의 ‘신한국
    사’를 참고했다. 클로슬로바의 연구 논문을 보면 체코신문이 어떤 경위로 한국의  3·1독립
    운동에 관심을 갖고 보도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체코군, 같은 식민지 한국에 연민 느껴”

    러시아 연해주의 한국 독립투사들은 블라디보스토크항에 대기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우수하다는 사실을 주목하고 있었다. 성능 좋은 무기로 무장이 절실했던
    독립운동조직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무기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특히 1920년 2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소비에트 적군과 휴전협정이 성립된 이후 서둘러 무기를 팔고
    자 했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무기를 팔기로 한 데는 러시아를 떠나는 데 드는 비용을 마련하는
    한편 무기가 소비에트 군대로 들어가는 것을 막자는 이유도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
    한 간도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과 독립투사들에게도 체코슬로바키아 군대의 무기가 절실
    했다. 독립운동 진영에서는 대일투쟁의 영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무기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간도지방의 최대 독립운동조직인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역시 러시아연해주에서 무기를
    구입했다. 북로군정서 대장 이범석(李範奭)은 자신의 회고록 ‘우등불’에서 한국 독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무기 구입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한 바 있다.

   “1차대전 중 독일·오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평화협정에 서명했다. 이어 체코슬로바키아는
    오스트리아로부터 독립해 자유민주국가가 되었다. 이 같은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전쟁에 
    참전하고 있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는 동유럽의 최전선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서유럽으로
    간다는 계획을 세웠다.

    서유럽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투를 벌이면서 독립을 되찾은 조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
    이었다. 이것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러시아를 가로질러 우랄산맥을 넘어 블라디보스토
    크에 집결한 이유였다. 블라디보스토크항에서 서유럽행 배편을 기다리고 있을 때 체코슬
    로바키아 군대는 한국에서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말을 전해들었다.

    이들은 체코슬로바키아가 오스트리아제국 식민통치 아래서 겪어온 노예 상태를 떠올렸고
    우리에 대해 연민을 표시했다. 결국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는 그들이 보관하고 있던 무
    기를 북로군정서에 판매하기로 했다. 무기 거래는 깊은 숲에서 한밤중에 이뤄졌다.
    이러한 무기들은 우리 진영으로 옮겨져 숲속에 무더기로 쌓아놓았다.”

     

       
     ▲ 시베리아 횡단철로를 따라 이동하고 있는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


   권총 200정 등 무기수송에 230명 동원

   이범석 대장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한국 독립투사에 무기를 팔기로 결정한 주된 이유
   가 같은 피압박 민족인 한국에 대한 동병상련(同病相憐)의 감정이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범석 외에 체코슬로바키아 군대 무기 구입과 관련한 증언자는 이우석이 있다. 당시 북간
   도에서 북로군정서에 참여하고 있던 이우석은 25세였다.

   이우석은 1920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체코슬로바키아군으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간도
   로 수송하는 부대의 책임자로 있었다. 이우석은 85세이던 1980년, 역사학자 박용석에게
   당시의 상황을 증언했다. “이 작전에 동원된 한국인 230명은 200정의 권총, 기관총, 탄약을
   옮겼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벌어진 비밀스러운 무기 거래는 여러 방면에 영향을 미쳤다. 무기 거래
   는 무엇보다 일본군을 자극했다. 특히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에 이와 관련된 소식이 보도
   되었다는 사실은 일본 정부에 매우 심각한 상황을 불러왔다. 1920년 3월 7일자 체코슬로
   바키아 덴니크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일본군 이나하기 대장이 러시아 당국에 항의 서한을 보내 “일본에 예속된 한국이 러시아
   영토에서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무기와 군수물자를 획득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일본대장은 이 서한에서  “1월 20일 (소련)임시정부가 한국인들의
   무기 구입을 금지시키는 명령을 내렸지만 이 명령은 여전히 서류상으로만 남아있다”고 
   주장했다. 

   이나하기 대장은 “만일 러시아 당국이 조치를 취하기를 꺼리거나 할 수 없다면 일본군이
   어쩔 수 없이 상황 통제를 감독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에서 유럽으로 떠나는 배에 오르는 체코슬로바키아 군인들.

   러시아와 일본군 사이의 긴장 고조는 일본군이 4월 4~5일 블라디보스토크를 침공해 점령
   하면서 최고조에 달했다. 일본군은 이러한 군사적 조치가 만주와 한국에서 반일 선전활동
   을 지원한 러시아의 공격적 행동과 관련이 있다고 정당화했다. 일본군은 블라디보스토크
   의 한인 집단 거주지역인 신한촌에 대한 공격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겼다.

   한국인 130명이 사망하고 250명이 부상한 신한촌의 비극은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청산리전투의 승리 공신은 체코군 무기

   무장독립운동사의 자랑이 1920년 10월 21~26일의 청산리 전투다. 김좌진, 이범석, 홍범도
   가 이끄는 무장독립군 2500명은 일본군 5000명을 몰살했다. 신용하, 박용석 등 한국 역사
   학자들은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구입한 고성능 신형 병기로 인해 북로군정서가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는 요인이 됐다고 강조한다.

   청산리전투의 빛나는 승리의 일등공신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로부터 사들인 무기였다는
   얘기다.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는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종간(終刊)됐다. 올샤 대사는 “1919년 당시 미국 시카고에는 최대의 체코슬로바키아 코뮤
   니티가 있었다”면서 “여기서 체코신문이 두 개가 발행되고 있었는데 이 신문들도 3·1독립
   운동을 보도했다”고 말했다.

   한국과 체코슬로바키아와의 인연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1918년 10월 민주공화국으로
   독립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초대 대통령은 당시 미국에 망명해 있던 지도자 토마시 마사릭
   (Masaryk). 마사릭 박사는 미국에서 대서양을 건너 곧바로 조국으로 가지 않고 블라디보스
   토크로 건너와 체코슬로바키아 군대를 격려했다.

   올샤 대사는 “마사릭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로 한반도를 종단해 부산항을 통해 일본을
   거쳐 체코슬로바키아로 갔다”고 말했다. 이는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망명군대의 비중이 어느 정도인지를 단적으로 말해준다.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 원본은 현재 주한체코대사인 야로슬라브 올샤 2세가 소장하고
    있다. 올샤 대사는 프라하 카를대학 출신으로 올해 46세. 2008년 9월 한국에 부임한 올샤
    대사는 2007년에 한국대사로 내정되었다. 한국은 올샤 대사의 두 번째 대사 부임지. 한국
    에 오기 전 올샤 대사는 아프리카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 3국 대사로 6년간 근무했다.

    2008년에 체코에서 ‘짐바브웨·잠비아·말라위의 역사’라는 책을 출간했다.
대사로 내정된
    직후, 올샤는 프라하도서관과 고서점을 뒤져 한국 관련 자료를 수집하기 시작했다. 몇 달
    동안 이렇게 수집한 서적은 100권이 넘는다. 이 과정에서 올샤 대사는 체코슬로바키아
    덴니크의 1919년 신문을 구할 수 있었다.

    올샤 대사의 부친 역시 대사를 지냈다. 부친은 16세 때 처음 인도네시아어를 접했고 1960
    년대부터 대학에서 인도네시아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부친은 벨벳혁명으로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인 1993년 첫 주인도네시아 체코대사로 부임했다.

    당시 하벨 대통령은 대사를 발탁하는 과정에서 외교관 경력보다는 주재국 언어를 구사하는
    능력을 최우선의 기준으로 삼았다. 부친은 인도네시아어 전문성을 인정받아 초대 주인도
    네시아 대사로 6년간 근무할 수 있었다. 부친은 2003년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제1권을
    펴냈다. 올해 체코·인도네시아어 사전 2권을 출간했다.

    올샤 대사는 아시아에 관심이 많은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부터 아시아와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에 관심을 가져왔다. 1989년 민주정부가 들어선 이후 1992년부터 외교부
    근무를 시작했다.



 


2. 3·1운동 영웅들 있었기에 밴쿠버의 영웅이...


    오늘이 삼일절만 아니었더라도, 올해가 한·일 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만 아니
   었더라도, 그냥 너희들을 향해 박수 치고 웃고 울며 이 감동의 순간들을 함께 맞이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금메달을 걸고 시상대에 오른 너희들의 자랑스러운 모습 위로 어쩔 수 없이
   떠오른 것은 김연아보다도 어린 열여덟 나이로 세상을 떠난 유관순 소녀의 얼굴
   이다.

   밴쿠버에서 들려오는 승리의 함성과 아우내 장터에서 독립을 절규하는 만세 소리
   가  함께 메아리치는 곳에 우리가 있다.
                                      < 학 = 두루미 = 연아의 나르는 듯한 움직임. /강화도님 >


   나라 잃은 시대에 태어난 젊은이들은 차갑고 위태로운 역사의 빙판 위에서 독립
   운동을 했다. 그리고 지금 88 서울 올림픽 때 태어난 너희들은 아름답고 평화로운
   세계의 빙판위에서 올림픽 경기의 운동을 즐긴다.

   같은 젊음이요 같은 운동인데 이렇게 다를 수가 있는가. 독립운동을 한 유관순의
   피와 피겨 스케이팅 운동을 한 김연아의 땀을 비교하자는 것이 아니다.

   나라 잃은 유관순이 오늘의 대한민국에 탄생한다면 김연아가 되었을 것이고, 대한
   민국의 김연아가 100년 전 망국의 땅에 태어났더라면 유관순의 이름으로 기억되
   었을지 모른다는 사실이다.
 



   삼일운동의 영웅들이 있었기에 오늘 밴쿠버의 영웅이 있다는 것을 너희들은 안다.
   그래서 나에게 있어서 조국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묻는다. 그렇다. 나라라고 하는
   것은 분명 추우면 주워 입고 더우면 벗어 던지는 그런 옷가지(衣裳)가 아니다.

   그것은 피부와도 같은 것이어서 어디를 가나 몸처럼 따라다닌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겨울올림픽은 기후와 그 경제조건으로 북방에 몰려 있는 유럽 선진국의
   독무대였다.

   그런데 오늘 너희들이 금메달을 따 세계를 놀라게 한 것은 개인의 기량만이 아니
   라 대한민국이라는 너희들 나라가 독립해 있었기에, 서구 선진국의 문턱을 넘어
   설 수 있을 만큼 발전했기에 가능했다. 


   너희들이 5000m와 아시아 선수들이 넘을 수 없다던 1만m 스피드 종목의 벽을
   넘어 금메달을 움켜쥘 때 나는 1988년 서울 올림픽 개막식에서 ‘벽을 넘어서’의
   대본을 만들던 일을 상기했다.

   20년 뒤 너희들이 정말 벽을 넘어 세계의 한복판에 설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김연아를 보라. 피겨 스케이팅의 피겨란 그림(圖形)을 뜻하는 말이다. 
   영국 귀족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빙판 위에 하트 모양이나 글자들을 그리며 즐기던
   운동이었다.

   김연아가 세계의 빙판 위에 그린 꿈과 메시지도 ‘벽을 넘어서’였다


    김연아가 세운 세계 신기록을 남자의 채점 방식으로 옮기면 168.00점.
    남자 피겨 우승자인 라이사첵의 167.37점을 넘어서는 득점이다. 

    피겨 여왕이 아니라 피겨 제왕이라고 불러야 옳다.

    또 김연아는 라이벌 일본의 벽을 넘는 드라마를 보여주었다.
    스포츠는 그냥 스포츠로 즐겨야 한다.

    그러나 우연히도 강제합병 100주년이 되는 해에 김연아는 그녀의 라이벌 아사다
    마오를 시원하게 이겼다. 

    데뷔할 무렵 연아는 주니어전에서도 시니어전에서도 패배를 당하고 일기장에
   “왜 하필 나와 같은 시대에 태어났는가”라며 마오를 원망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어느 여자 선수도 기록하지 못한 3.5회전의 트리플 악셀을 연속 성공시킨
   마오를 20점 차로 꺾은 것은 한국인다운 끈기였다.

   쇼트에서는 007 본드 걸의 하드와 다이내믹한 힘을 보여주고, 프리에서는 경쾌
   하고 청초한 매력으로 조화를 이룬 한국인 특유의 ‘신바람’과 ‘끼’
일본의 가다
   (型=틀)
를 압도한 것이다. 

   셋째로 김연아는 한국 문화의 벽마저 뛰어넘어 글로벌한 새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시상대에서 흘리는 눈물은 이미 보릿고개에 자란 선수들이 흘렸던 한의 
   눈물이 아니었다. 식민지인의 그늘이나 열등의식을 찾아볼 수 없다. 

 

 


   그리고 김연아의 성공 뒤에는 그녀의 가족만이 아니라 코치를 비롯한 외국인
   스태프의 드림팀이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너희들은 물질적 풍요를 위한 ‘산업화의 경제원리’와 평등을 추구해 온 ‘민주화의
   정치원리’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들이다. 이제는 이 두 벽마저 넘어 사랑과 소통을
   추구하는 ‘생명화의 문화원리’를 창조해 내게 될 것이다.


   밴쿠버의 젊은이들아. 너희들 때문에 처음으로 지역차별의 분열도 좌우의 이념
   대결도 그리고 여야의 갈등도 없이 대한민국은 하나가 되어 모처럼 함께 웃고
   함께 울었다. 고맙구나. 장하구나.

   이어령


3. 그간 법정스님에 대한 비판적인(?) 글에 대한 이웃님의 답글입니다. 


    "법정과 도올"에 대한 사견을 쓰신 시인이 어느 해에 이글을 쓰셨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조금 오해가 있으신것 같아서 님에게는 말해야 되겠습니다.

    법정 어른스님을 따르는 신도들이 전국적으로 많은건 사실입니다만
    글을 잘 써서가 아니고 또 말씀을 잘 해서도 아닙니다.

    그런건 세속인들의 눈에 비취는 모습이구요.
    이 분이 70년대에 박정권하에 문인들이 많이 체포되고 언론의 자유가 없던 시절
    칼날같은 바른 소리로 정치인을 향해서 많은 강연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때 지식은 있으되 바른소리를 못하고 숨죽여 살고있던 다른 승려나 교수들에
    비하면 할말을 해 가면서 신문에 기고도 많이하고 책도 몇권 냈습니다.

    숨죽여 살고 있던 시절에 죽음을 각오하고 많은 바른소리를 하시니까 대리만족으로
    인기가 급상승 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 동박새 夫婦... 
 꽃송이님
 >
    

 

 

 

 



    불교에서의 승려란 본인이 선방에 앉아서 참선으로 기도정진하면서 공부하는
    사람과 학생을 가르치며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 등등의 몇가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어른은 젊은 시절에는 불교 출판사일이나 강원의 강사 역할등을 거치면서
    몸을 아끼지 않고 강행군을 했든 관계로 폐에 이상이 생겼습니다.(폐암초기)

    우리나라에는 종교의 자유가 중구남방인 관계로 종교인끼리 서로를 헐뜯고 있을때
    맨 먼저 김수환 추기경님과 손을 맞잡고 서로 상대종교를 존중하는 참 모습을 실천에
    옮기면서 불자들에게도 다른 종교의 우수성은 인정해야 한다고 교육시키면서 서로
    사랑하라고 강의때 자주 말씀 하셨습니다.

    조계사 뒷편 불일암에 계시면서 조용히 병치료를 할려는데 너무나 많은 불자와 출판사
    관계자들이 찾아오니까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느날 혼자 홀연히 강원도
    계방산 아래 아무도 모르는 외딴 곳에 초막을 짓고 살았습니다.
    그러던 중에 대원각(지금길상사)사건이 터졌습니다.

    갑자기 떠 안겨진 길상사 일로 인하여 병은 더 악화됐으며 본인의 의지로
    병마와 싸워오던 중 제자들과 신도들의 성화로 2년전에 미국의 암치료 잘 하는 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오셨습니다.(이때는 중증폐암으로 발전)

    글 쓰신 분의 궁금증처럼 그 많은 책의 인세라든지 팔린 책의 돈이 많을 것이라 짐작되겠
    지만 실은 그렇지가 못했습니다.

    저가 듣기로는 길상사 절을 인수하기 전에 이미 맑고 향기롭게란 사회운동과
    파리와 미국에 절을 건립하고 많은 돈을 지출할수 밖에 없었답니다.

    

 

 

 



    그 이후에 빚을 갚는 명목으로 예전에 써 두었던 글과 다른 책에서의 발췌한것을
    출판하여 책을 한꺼번에 여러권 냈습니다.(시인 류시화가 주축이되어)

    제자들이 의논하여 빚갚는다는 명목하에 스님은 넘 많이 아파서
    이런저런 신경을 쓸 겨를이 없을때(2008~2009)제목만 바뀌어져 책이 여러권 발간
    됐습니다.(지금껏 중에 젤 많이 출판되고 내용은 부실하게 중복되는 것도많음)

    시체말로 스님의 유명세를 내세워서 돈을 벌었지요.

   그바람에 빚은 모두 청산 됐으며 따뜻한 남쪽에서 요양을 했던 관계로 많이 좋아져서
   이번 봄이되면 길상사 법회에도 나올 수 있다고 합니다.

   길상사의 재산이 스님 것이 아니고 사회와 조교종 종단에서 관리하는 것이니 스님은
   꼭 필요한 돈이 아니면 몸에 지니고 다니지 않는다는 정신만은 틀리지 않습니다.

   저가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것은
저가 길상사 도서관 담당 봉사활동을 몇년간
   했기에 다른신도들 보다는 내용을 듣기가 쉬웠으니까요
.(지금은 쉬고있음)

   그리고 어른께서는 썩어가는 한국 불교계의 단면을 수도 없이 지적을 많이 하셨기에
   종단에서 미움을 많이 사기도 했습니다.

   몸이 아프다는 걸 알리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숨어서 책만 내고 비 타협적이라고 스님을
   꼬집는 사람들도 꽤 있습니다.

    

 

 

 



   님은 無 종교이시니 어느 쪽에도 치우치는 생각은 않으시리라 믿습니다.

   보통 절에 다니면서 기복 신앙으로 불상에 절이나 하고 소원이나 빌고 다니는
   일부 불자들도 있겠지만 그래도 저가 보기엔 법정 어른을 따르는 사람들은
   철학이 뚜렷한 사람이 많다고 봅니다.

   장황하게 두서 없이 글을 써내려가다 보니까 맘속의 표현은 전달되지 못하고 어수선하게
   되어버렸네요.^^* 

   법정스님도 지독한 병마와 싸워오신 관계로 지금 다시 오신다 해도 옛날처럼 칼날같이
   예리한 지성은 많이 사라지셨으리라 믿습니다.

   저는 70년대부터 그분을 존경해 왔든 관계로 그어른이 빨리 회복이되어 혼탁한 사회를
   좀더 맑히고 떠났으면 하는게 저의 바램입니다.

   좋은 글 올려주신 덕분에 저도 이런 글을 님께 올리고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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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 3월 2일 오전 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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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주에 비해 상대적으로 쌀쌀한 분위기를 느낍니다.
    서울 영상1도/7도, 부산 5도/12도... 전국이 흐리고 강한 바람.
    내일 남해안이나 제주 한때비. 모레는 전국적으로 비또는 눈이...
    환절기 궂은 날씨에 조심하시구요...
    • 고란초 고란초
      화석님, 방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그간 제가 시간이 없어서 제대로 답글을 달지 못했네요.
      정말 죄송합니다.
      잠시 따뜻하다가 꽃샘추위가 온다고 합니다.
      항상 건강 조심하시고 오늘도 행복한 하루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