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를 흔히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한다. 결과가 예정된 게임은 재미가 없다. 무엇보다 감동이 없다. 스포츠는 땀과 땀이 대결하는 경기이다. 흘린 땀의 노력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2010년 6월23일 새벽 대한민국은 하나가 됐다.
한반도 남쪽은 물론 북쪽 그리고 세계 각국에 퍼져 나간 한민족 모두가 하나가 됐다. 아시아 축구가 유럽과 아프리카를 넘어 세계 최강국이 모인다는 16강에 진출하는 것은 어쩌면 꿈이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그랬다. 한국이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을 이뤄냈지만,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 이라는 한계는 외국 언론의 따가운 시선을 불러온 요인이었다. 모든 개최국이 (이번에 남아프리카공화국은 16강 진출에 실패했지만)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서는 선전했다.
한국의 객관적인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어떤 언론사 편집국장은 한국이 아르헨티나를 이길 것으로 생각했다는 '주장'을 펼쳤지만, 그러한 주장은 바람이나 무지에 가깝다. 한국이 자랑하는 박지성은 훌륭한 선수이기는 하지만 영국 프로축구리그 맨처스터유나 이티드 부동의 주전선수라고 보기는 어렵다.
주전급 선수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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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프로축구리그 AS 모나코의 박주영이나 영국 리그 볼튼의 이청용, 스코틀랜드 프로축구리그 셀틱의 기성용 등은 모두 장래가 촉망받는 선수이지만, 다른 나라에도 유망주들은 많다. 한국과 예선을 치렀던 아르헨티나가 그렇고, 나이지리아가 그렇다.
아르헨티나의 매시나 이과인은 세계 축구팬 누구나 아는 최고 수준의 선수들이다. 후안 베론이 전성기를 지났다고 하나 한때는 지단이나 피구, 베컴과 더불어 세계 최고 수준의 게임메이커로 평가받던 선수이다.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들로 구성된 아르헨티나를 만나 1대4 패배를 당했다. 분명 기대에 못 미치는 성적이었지만, 선수들 나름대로 선전했다. 감독의 전술 실패, 선수기용 미스 등 여러 가지 요인을 따져야 하겠지만 객관적인 실력 차이 자체를 무시 해서는 안 될 노릇이다.
23일 새벽 나이지리아는 경기 막판 무서운 뒷심을 보여주며 파상 공세를 펼쳤다. 나이지리아의 공격력은 매섭고 강했다. 1대1 찬스 등을 놓치지 않았다면 경기 결과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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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지리아는 최상의 전력이 아니었다. 한국의 박지성, 어쩌면 그 이상의 비중을 차지 하는 선수가 빠졌기 때문이다. 영국 첼시에서 뛰는 야전 사령관 '존 오비 미켈'이 그 주인공이다. 나이지리아를 실질적으로 이끄는 핵심 선수였지만, 부상으로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했다.
한국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나이지리아 선수 개인의 실력은 한국보다 뛰어나다고 봐야 한다. 다만, 꽉 짜여진 조직력이 미흡하다는 게 세계 최고무대에서 좌절한 배경 으로 보인다. 그리스는 아는 것처럼 유로 2004에서 깜짝 우승을 차지한 복병이다.
명장 '오토 레하겔' 감독이 이끄는 그리스는 전성기가 지난 팀이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유럽 예선을 넘어 강호 우크라이나와 플레이오프까지 가면서 월드컵 진출권을 따낸 팀이다. 한국이 2대0으로 이겼지만, 결코 만만히 볼 팀이 아니었다.
냉정히 말해 아르헨티나는 우승을 노릴 팀이었고, 나이지리아 역시 최상의 전력이었다면 8강 이상을 노려볼 팀이었다. 그리스는 조직력만 유감 없이 보여준다면 16강을 충분히 노려볼 전력을 지녔다.
한국은 그런 팀들에 맞선 아시아의 강국이다. 아시아에서 한국이 축구 강국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지만, 세계 언론의 시선은 한국을 축구강국으로 분류하지 않는다. 한국은 나머지 3개국에 비해 16강 진출 가능성이 적다는 평가를 받았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판단 역시 유럽 위주의 시각이 반영된 결과이다. 한국은 특유의 기동력과 체력, 무엇보다 정신력이 뛰어난 팀이다. 뛰어난 정신력의 배경에는 수많은 국민의 아낌 없는 성원과 열정이 그 바탕에 있다.
한국 프로축구는 축구강국에 비해 명함을 내밀기 어려울 정도로 척박하지만 국가대항전 만큼은 나라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관심을 받아온 게 현실이다. 이념과 지역과 세대의 갈등 상황에서도 축구는 대한민국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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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사상 첫 월드컵 원정 16강 진출은 수많은 국민에게 청량감을 안겨준 쾌거로 기록 될 것으로 보인다. 그 여정이 얼마나 힘겹고 험난했는지는 수많은 사람이 공감할 것이다. 23일 새벽 나이지리아와 경기를 되돌아본다면 경기결과는 다시 반복하기 어려운 기적에 가까운 경기였는지도 모른다.
축구에서 첫 골을 내준 뒤 역전을 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월드컵처럼 수준 높은 팀들이 참여한 경기에서는 더 그렇다. 한국은 이번에도 나이지리아에 기습 골을 허용했다. 측면 돌파에 이은 크로스, 한번의 기회를 놓치지 않는 슈팅 등 나이지리아가 선전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한국의 뼈아픈 실책이라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런 상황이 발생하면 다른 선수들까지 발이 풀릴 수밖에 없다. 한 경기를 그르치면 다음 경기는 없다. 실책으로 인한 실점을 당하고도 제자리를 찾은 것은 강한 정신력이 뒷받침 되면 안 된다.
한국의 동점골 상황은 '행운의 여신'이 한국에 있음을 확인시켜준 대목이다. 공격수 출신 의 수비수 이정수는 헤딩을 준비했지만, 공은 오른 발을 맞고 골문을 갈랐다. 이번 대회 에서 최고 골키퍼 중 한 명인 나이지리아 골키퍼는 어떻게 해볼 틈도 없이 실점하고 말았다.
두 번째 박주영의 골은 특유의 감아 차기 기술이 실전에 반영된 결과이다. 박주영은 여러 경기에서 프리킥으로 골 맛을 봤다. 자신의 본 실력을 실전에 발휘할 수 있을지가 관건이었다. 특히 박주영은 아르헨티나 전에서의 자책골과 여러 차례 기회를 놓치는 상황이 겹치면서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입지가 점점 좁아지는 상황이었다.
이를 만회하는 골을 기록했다는 점은 다음 경기에서 긍정적 요인으로 분석된다. 사실 김남일 투입이 대실패로 끝난 것은 이날 경기의 중요한 분수령이었다. 김남일을 교체 투입한 이유는 하나다.
베테랑 선수답게 어린 선수들을 잘 조율해서 경기를 마무리하라는 특명을 줬다. 안정적인 수비와 적절한 게임 조율은 그 기본 역할이었다. 하지만 김남일은 한국 페널티 에어리어 안에서 실수를 범했고, 심지어는 상대 공격수를 뒤에서 태클 했다. 경고와 함께 페널티킥을 줬지만, 퇴장 명령을 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김남일이 퇴장 당했다면 한국의 16강 진출은 사실상 실패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2대2 동점 상황과 함께 나이지리아의 파상 공세를 수적 열세인 상황에서 막아내는 것은 어렵다고 봐야 한다. 무엇보다 선수들의 심리적 좌절이 극에 달할 수 있다.
한국은 수많은 위기와 어려움 속에 2대2 무승부를 이뤄냈다. 원정 첫 16강 진출에 성공 했다. 경기에서 실수를 한 선수도 있고 선전한 선수도 있지만, 그들을 감싸주는 것은 결국 한국에서 밤잠을 설치며 경기를 지켜봤던 수많은 국민의 몫이다.
축구를 해본 사람은 안다. 후반전을 넘어 체력이 바닥이 나고, 숨이 턱까지 차 오를 때 그 고통이 어느 정도인지…. 게다가 월드컵이라는 인생 일대의 경기에서 그 긴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이영표 박지성 선수 등 베테랑들이 경기를 잘 조율해준 덕도 있지만, 젊은 선수들이 그 긴장을 이겨내고 강호 나이지리아와 2대2 무승부를 거뒀다는 점은 대단한 선전이라고 평가해도 아깝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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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력이 바닥날 정도로 뛴 선수들과 그들을 가슴 졸이며 지켜봤던 코치들에게 아낌없는 박수를 보낼 때다. 웃을 일 찾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축구는 수많은 이에게 짜릿한 감동을 안겨줬다.
'국민 청량제'가 됐다는 것만으로도 23일 새벽 한국 선수들의 그 열정과 투지는 평가받을 만 하다.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내자. 선수들과 그들을 응원한 우리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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