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이제 환갑입니다. 그때도 이순신 장군이 계셨습니다. / 감자

2011. 11. 11. 21:39화석·청천리님 방

 

6.25... 이제 환갑입니다. 그때도 이순신 장군이 계셨습니다. / 감자!

2010.06.25 06:10 | 님들의 휴게실 | 화석

http://kr.blog.yahoo.com/goran5006/2130 

 

작년 6.25에 작성한 글입니다. 꼭 다시 읽어 보시길...


   프롤로그   이순신의 죽음은 스스로 택한 죽음이었다. 
                   그러나  이순신장군의 유비무환 정신과 당파와 오너의 요구에도 초연한...
                   스스로 조용히 침묵하며 오직 나라를 위한 마음으로...

                   여기도 6.25로부터 조국을 구한 이순신장군과 같은 인물이 있었으니!!!


   여기에 소개되는 이 화면은 작년 자료입니다만. 그 내용이 매우 마음에 와 닿는지라
   원본을 찾아... 그 내용을 요약해 올립니다. 이 동영상은 원본의 1/10쯤 됩니다. 
   큰 내용은 모두 요약했습니다.

   제목은  "북한군, 왜 3일간 서울에서 머물렀나?" 
입니다.
   그렇지 않았으면 우리는 지금쯤... 일찌감치 나라가 공산당에 넘어갔을 겁니다.
   꼭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1.북한군이 서울을 파죽지세로 몰고 들어 와 서울을 점령한 것은 1950년 6월 28일 
       오전입니다. 총성을 터뜨린지 만 3일...

    의문을 갖는 건 바로 이 6월28일부터 7월1일까지 3일간의 북한군의 동정입니다.
    이들은 왜 3일간 강을 건너지않고 멈춰있었던 것일까? 뭐 어쩌면 이상한 일이 아닌지도
    모릅니다.

    당시 한강다리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고 남한의 심장부인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이 기쁨에 
    들떠 잠시 축제의 분위기에 젖어있을 수도 있습니다.그리고 쉴새없이 진격해 내려온
    북한군이 군의 재정비를 위해 잠시 쉴 수도 있는 시간입니다.

    전쟁 중에 미군사령부가 매일매일 군부대에 내려보냈던 군정보집니다. 그 중에 1951년
    5월 15일자를 보면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방어선을 뚫지못하자 김일성은 북한군 사령부
    에 그 원인을 분석하라고 합니다. 그랬더니 여러 가지 원인을 뽑았는데 바로 서울을
    점령한 뒤 한강을 건너는데 시간을 지체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건 김일성 스스로가 전쟁실패의 원인으로 분석할 정도로
    아주 중요한 것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실제 3일은 전쟁에 어떤 영향을 미친걸까요?


    



   #2. 강이북의 북한군 "6월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이에 비해 6월28일 오전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의 기세는 하늘을 찌를듯했다. 당시 북한군은 다섯 개의 사단과 함께
     350대의 전차를 보유하고 있었다.

    
방어능력을 거의 상실한 한국군에 비해 북한군의 전력은 막강했던 것이다.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뒤 곧바로 한강을 건넜다면 전황은 겁잡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초기에
     25일부터 28일까지의 진격속도를 계산해보면 45키로를 3일동안.진격한 것이다.
 
     1일 평균 15키론데 그 계산은 아측이 상당한 정도의 정항을 했다는 전제하에서 보인
     진격 속돕니다. 그러나 한강이남에서의 진격은 아측이 거의 전투력을 상실했다고 가정
     한다면 이건 보병사단이 1일 진격하는 최대속도로 내려갔다고 할 수 있다.

     그건 역사상 1일 25키로로 계산된다. 만일 북한군이 한강을 곧바로 건넜고 이후 1일 
     25키로 속도로 진격했다고 가정한다면 북한군은 3일만에 조치원, 그리고 6일만에 
     대전을 점령하게 된다. 무서운 속도로 남한을 점령하게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군은 강이북에서 갑자기 진격을 멈췄다. 그리고 그것은 북한군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준다. 바로 그 사이 한국군은 재정비를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가하면 그 사이 
     한국에선 새로운 변수가 발생한다. 6월29일,수원비행장에 도착한 맥아더는 한강의
     상황을 보고 미군의 참전을 결정한다.

     그리고
이틀 뒤인 7월1일 미군 육군 부대가 긴급히 투입된다. 이렇게해서 북한군이
     서울에 머물러있는 3일동안 한국군은 방어력을 갖추게된다.
북한군에 밀려 한강이남
     으로 쫓겨내려 왔던 3일전과는 상황이 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후 전쟁의 양상도
     바뀌게된다.

    



    #3. 북한군이 서울에 3일동안 체류하는 동안 한국군은 지연전을 수행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 됩니다. 지연전이라고하는 것은 공간을 내어주고 시간을 얻는다는 작전계획입니다.
 
     결과적으로는 낙동강방어선을 형성해서 반격작전을 실시할 수 있는 계기를 얻게되는
     겁니다. 군사전문가들은 세계 어느나라 전쟁에서도 초기에 진격을 멈추는 예는 없었다고
     합니다. 그만큼 전쟁초기에 상대방에게 시간을 준다는 건 군전략상 아주 치명적인 것
     입니다...
 
     지금까지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간 머문 것을 한국전쟁 최대 미스터리로 여겨온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28일 새벽 북한군이 서울의 관문이라고 할 수 있는 미아리방어선을 돌파하자 국군이
     곧바로 폭파한 것으로 북한군의 진격을 막기위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북한군은 350대의
     탱크를 앞세운 5개사단으로 대규모의 병력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다리가 끊어진 상태에서 중장비를 갖춘 대부대가 일제히 강을 건너기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이 한강인도교의 폭파가 북한군이 강을 건너지못하게한
     결정적인 원인이었을까요?

     도하수단으로는 2차대전의 예를 본다면 가장 간단한 것으로서는 모터가 달린 도하용
     주정이 있을 수 있습니다. 문교 또는 부교를 설치하게되면 트럭이나 전차같은 장비
     도하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당시 북한군으로서는 이런 장비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금강선에서도 북한군은 도하장비가 없어서 땟목을 이용한다거나 수영을 한다거나 이런
     방법의 도하를 시도했고 낙동강방어선에도 마찬가지고 그러한 방법으로 도하를 기도
     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다할 도하장비가 없었기 때문에 북한군은 강을 건너지 못한 것일까?
     그러나 당시 한강에는 배가 많이 다녔다. 한강엔 마포, 서빙고 서강 나루터등 여섯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이 철교를 이용하려면 어느 정도의 보수시간이 필요한 걸까..
     실제 7월1일 북한군이 본격적으로 강을 건너기 시작할때의 상황을 보면 이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북한군의 일부는 나룻배를 이용했다.

     또한 북한군은 경부철교도 이용했다 7월1일 밤부터 철교보수작업에 들어간 북한군은
     한국군의 저항을 피하기위해 밤에만 작업을 했다. 그 결과 이틀만인 7월3일 새벽
     북한군의 전차는 강을 건넜다.


    



   #
4. 비록 다리가 폭파되고 특별한 도하장비가 없었더라도 북한군이 강을 건널 의지만
     있었다면 28일 서울점령 직후에도 충분히 가능했습니다. 어쩌면 한국군이 미처 재정비
     가 되지않은 28일 당일 강을 건넜다면 더욱 쉬웠을 겁니다. 그러니까 북한군이 강을
     건너지못한 건 다리가 폭파되었기 때문은 아닌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가 뭘까?

     서울만 점령하면 전쟁은 끝난다..? 언뜻 이해가 되지않는 이야깁니다만 이것이 한때 학계
     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던 서울제한점령론입니다.
그 내용의 핵심은 북한군이 서울만 점령
     하면 남한내 남로당이 봉기를 해서 군사적으로는 물론 정치적으로도 남한을 점령할 수
     있다는 주장입니다.

     그러나 서울에서 3일간 기다려도 봉기가 일어나지않고 더욱이 미군이 예상보다 빨리
     개입하게되자 작전을 바꿔서 남하를 하게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요?

     김영삼과 옐친 15" 지난 94년 러시아 대통령 옐친은 김영삼전대통령에게 소중한 자료를 
     전해주었다. 바로 한국전쟁에 관련해 소련과 북한사이에 오갔던 외교문서들이다.
     전쟁1년 전인 1949년1월부터 1953년 7월까지 전쟁 전기간에 김일성과 스탈린간에
     오갔던 문서들...

   "김일성은 빨치산들로부터 큰 원조를 기대할 수 없다고 보고 있습니다. 김일성은 박헌영
     과 달랐다. 조선노동당 주석이었던 김일성에게 부주석인 박헌영의 영향은 컸다.
     그런데도 49년 9월 툰킨과의 면담자리에서 김일성은 전쟁이후 빨치산의 활동에 대해
     확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빨치산 사진 32" 실제로 50년 초가 되면서 김일성은 빨치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게
     된다 49년 여름 활발히 활동했던 빨치산들은 남한에서의 대규모 빨치산 소탕작전에 의해
     50년초 위기를 맞기때문이다. 지리산으로 쫓겨간 북한군들은 50년봄을 고비로 대부분
     토벌된다.

     실제 전쟁직전 북한에선 전면전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는 여러 문서들이 있다.
     6월23일 한 소련고문이 인민군장교들에게 한강지역에 도착하면 먼저 도하하라는 내용의
     훈시를 했다고 한다.

     그러면 과연 북한군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5. 북한의 남침을 스탈린이 승인한다는 건 소련이 미국과 합의한 얄타협정을 파기한다는
     걸 의미하고 그것은 결국 미국과의 전면적인 대결을 승인하는거다. 소련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러한 국제정세속에서 소련이 생각한 건 북한이 남침할 경우 자력으로 빠른 시간안에
     승리를 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러기위해선 북한군이 남한군에 비해 군전력상 절대적인
     우위에 있어야한다는 것이다.

     1949년 소련이 핵실험에 성공하게 되고 또한 중국은 공산혁명에 성공하게된다.
     아시아에서 이렇게 공산권에 유리한 국제정세가 전개되 스탈린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
     하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소련은 여전히 미국을 의식하고 있었다. 남침지원을 결정하자마자 곧바로 소련은 
     북한의 군전력을 강화하기위한 적극적인 지원을 한다. 이렇게해서 나온 것이 바로 선제
     타격작전도다. 이 선제타격작전도엔 미군이 개입하기 전 전쟁을 끝내려했던 소련의
     의도가...

     1단계작전이 바로 주력을 섬멸하는 1단계작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보면 특히 수원
     이북지역이 강조되어있다. 이는 서울에서 한국군을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부대가 한국군을 포위섬멸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수원이북에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하면 이후엔 큰 저항없이 쉽게 진격
     한다는  계획이다. 북한군 작전의 핵심은 바로 1단계작전에 있었습니다. 북한군주공
     부대가 서울을 점령 한국군주력부대를 강이남으로 밀어내면 춘천을 점령한 북한군
     조공부대가 수원으로 내려와 강이남으로 내려온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작전이 성공을 하기위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건 주공부대의 서울점령시간과 조공
     부대의 수원점령시간이 맞아야합니다. 그래야 효과적으로 한국군주력부대를 포위섬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 처음엔 북한군의 의도대로 되는 듯 했습니다.

    서부전선에 투입된 북한군은 개성 동두천 포천을 단숩에 점령했습니다..이때 한국군 
    주력부대와 예비부대는 마지막 방어선인 의정부로 황급히 투입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서운 기세로 내려오던 북한군에 의해 의정부마저 함락되었고 단 3일만에
    서울이 점령되었습니다.


    북한의 작전대로 서울에서 밀려내려간 한국군 주력부대는 섬멸될 위기에 놓였던 것
    입니다.

    



  
#6. 그런데 문제는 중부전선이었습니다. 북한군의 1단계작전이 성공하기위해선 중부전선
     에서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 수원으로 내려와야합니다. 그런데 춘천에서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당시 춘천에선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던것일까요?

     당시
춘천으로 투입된 부대는 북한군 2사단이다 이들은 북한군이 전쟁 2개월전에 실시한
     검열작업에서 최우수 정예부대로 뽑힌 부대
로 채 30분도 지나지않아 이곳 모진교를 돌파
     했다. 그런데 문제는 옥산포였다.

     당시 이곳 옥산포는 보리밭이 넓게 펼쳐져있었다 춘천을 방어하고있던
한국군 6사단은
     뒤늦게 남침소식을 듣고 이곳에 도착했다. 그리고 진격해오는 북한군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북한군은 잠시 멈칫했다.

     오후가 되자 북한군은 다시 공격을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 한국군은 이미 예비대까지
     출동해 우두산측면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거세어진 한국군의 반격에 북한군은
     또다시 주춤하고 말았다. 결국 북한군은 옥산포에서 더 이상 진격을 하지못한채 하루를
     보내게 된다.

     당시 북한군의 병력과 화력손실은 막대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손실은
춘천을 하루만에
     점령한다는 계획이 무너졌다는 것이다.
당시 철저히 준비를 하고 진격해왔던 북한군을
     어떻게 한국군6사단은 막아낼 수 있었을까?

     당시 한국군 6사단은 옥산포가 내려다보이는 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북한군이
     남침했다는 소식을 들은 한국군6사단은 곧바로 이곳 진지로 투입돼 진격해오고있는
     북한군을 향해 정확히 총을 겨눌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6사단7연대는 전쟁이 나기 한달 전 군사병들과 춘천중고등학교 학생들을 
    동원해 이곳 우두산에 참호를 팠다 그리고 참호의 주인을 정해놓고 실전처럼 훈련
    을 했다.
전쟁 나기 전에 선정해서 진지 구축했다는 건 높이 평가할 일이고
    유비무환이다.

    이렇게 이틀간 옥산포를 지키고있던 한국군은 다음날 소양강일대로 후퇴한다. 
    소양교로 팬 양구쪽에서 진격해오고 있는 북한군으로부터 포위의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
    이다. 이곳 소양교를 사이에 두고 북한군과 한국군6사단은 이틀간이나 격전이 벌어졌다.

    당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은 지금도 소양교 다리에 남아있다. 소양교는 춘천으로 들어가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작전을 제대로 수행하지못한 북한군 2사단은 소양교를 건너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미리 진지를 구축하고있던 한국군의 거센 반격에 꼼짝을 못한다.

    



   蛇足) 보병이 막을 것도 포병이 막아줬다. 포병이 춘천방어에 공헌한 것이다. 실제 당시
      춘천으로 진격해왔던 북한군포로들의 심문서를 보면 포병에 대한 두려움이 아주 컸음
      을 알 수 있다.

      "남한포병정확...유산탄이 공포야기"  "2사단 춘천에서 40%사상..포병 탓.. 자주포도 
       파괴되다."

      그렇다면 당시 한국군 6사단이 북한군을 맞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시 한국군 6사단의 병력과 화력은 북한군에 비해 현저히 약했다. 비교 병력은 북한군
      에 4분의 1도 (북한군과 한국군포) 안되는 수준이었으며 화력도 북한군의 수준에 못
      미쳤다.

      20" 당시 포만 비교해봐도 북한군의 포는 122미리포였고 한국군6사단의 포는 105미리 
      곡사포였다. 사정거리만으로도 그 성능이 두배 가까이 차이 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한국군의 포는 북한군에게 위력적이었다. 포병은 다른 병과와 틀려서 제 요소
      가 통합되었을 때 올바틀 전투력을 발휘할 수 있다. 예를들어 사격지휘라든지 관측등 
      제요소가 서로 통합되었을 때 요망하는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이건 평시 교육훈련을 통해 가능하다고 본다. 당시 미리 구축해놓은 방어진지
      에서 철실한 실전훈련을 했었기에 화력이 약한 포로도 북한군을 제압할 수 
      있었던 것이다. 철저한 준비와 실전과같은 훈련이 있었기에 한국군6사단은 
      춘천을 방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한국군6사단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서부전선은 모두 허물어진 상태였다. 결국 
      27일저녁엔 6사단도 후퇴하게되었다. 하지만 한국군 6사단은 하루만에 춘천을 점령한다
      는 북한군의 계획을 무너뜨리고 사흘이란 시간을 지연시켰다.

    



   #7. 그럼 이번엔 홍천쪽을 보겠습니다. 당시 홍천에 투입된 북한군 12사단은 중공군출신
     으로 실전경험이 있는 아주 막강한 부댑니다. 설사 춘천지역에 문제가 생기더라도 북한
     군 12사단이 계획대로 홍천을 점령했다면 춘천을 방어하고 있던 6사단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북한군 12사단 역시 제대로 임무를 수행하지못합니다.

     홍천점령의 임무를 맡은 북한군12사단은 양구를 거쳐 홍천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들은
     한국군방어선을 뚫고 거침없이 내려오고 있었다..이러한 12사단의 발목이 잡힌 곳이
     이곳 말고개다.

     당시 북한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북한군의 가장 강한 무기인 탱크가 이곳에서 10여대나
     부숴졌다. 지금은 잘 닦여진 도로지만 당시 이곳은 산길로 한국군에겐 천혜의 요지였다.
   
     증언자..

   "여기서부터 좁았지..길은 차가 겨우 하나 정도 한 5미터즈음 되겠지..꼬불꼬불하고 S자형"

    당시 이곳을 지키고있던 부대는 한국군 6사단 2연대였다. 북한군 12사단에 밀려 후퇴하던
    한국군 6사단은 이곳에 마지막 방어선을 구축했다.

   
우리 연대장께서 그 당시 교육중에 있었다 6.25나자마자 원대복귀해서 도저히 적 
    탱크를 육탄으로 막지않으면 막을 수가 없다.그러니 여러분이 대표해서 희생해다오.

   
당시 북한군이 보유하고있던 T-34는 85미리 포를 장착하고 있는 최신형의 중전차였다.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미군의 경전차를 일거에 부술 정도의 위력을 가지고 있었다.
    T-34전차에 맞설만한 무기는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6사단 2연대는 좁은 길을 따라서 진격해 올 T-34전차와 맞서기위해 인근산에 대전차포와 
    소총을 배치했다. 그리고 11명으로 구성된 육탄돌격대도 결성했다. 주먹밥을 가지고왔다..
    밥을 먹으려는데 소총전 벌어진다.. 그래 싸우다 싸우다 안되니까 탱크 들이민다

    당시 육탄돌격대들은 꼬불꼬불한 지형을 이용해 길옆에 몸을 숨기고있었다. 대전차포의
    기습을 받은 탱크들은 느린 속도로 진격해오고 있었다. 그리고 전차가 모습을 드러냈을 때
    육탄돌격대들은 전차에 뛰어올랐다.

    부숴진 탱크 15" 전차에 수류탄을 던지고 다시 뛰어내리는 것이 육탄돌격대의 임무다.
    대전차포와 육탄돌격대의 기습으로 6월28일 말고개에서는 북한군의 전차진입을 막을 수
    있었다.
   
    증언자 이야기...순간적으로 나도 정신없이 뛰어오르지 어떻게 뛰어올랐는지 모르고
    어떻게 뛰어내렸는지도 모르고 올라와가지고 올라오기전에는 머리 맞아도 피도 안나오고
    아무것도 안나오니까 그제서야 와보니까 새카마니 전차는 깔렸지 나묵사지에 탁탁 걸렸
    지 아 진짜 눈뜨고 못있을 정도로 비참했어요

    전쟁나면 이렇게 비참하구나...
    나도 죽으면 저렇게 가루가 되는데 저렇게 죽이려하나 말이지요..이런 심정이예요

    당시 육탄돌격대원 대부분이 유명을 달리했다. 이렇게 한국군6사단 2연대의 방어전으로
    인해 북한군 12사단 역시 28일까지 홍천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있었다. 춘천 이렇게 춘천,
    홍천지역의 점령을 맡았던 북한군 2사단과 12사단의 계획은 무너졌다

    

   에필로그...

   춘천 소양교와 홍천 말고개에서의 전투는 북한군에게는 전혀 예상치못했던 일이었습니다..
   그만큼 북한군의 충격은 컸습니다. 춘천-홍천지역에서의 전투가 끝난 뒤 곧바로 북한군과
   소련고문단은 북한군조직의 대대적인 개편을 단행합니다.

   춘천,홍천점령의 총책이라고 할 수 있는 2군단장을 교체하고 2사단장도 해임합니다.
   그리고 이외에 2사단과 12사단의 책임자들을 일제히 바꿉니다.


   저의 느낌...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누가 뭐라 하더라도 이순신장군과 같은 묵묵히 유비무환의
   정신으로 준비하는 선인들이 계심에...

   그도 안되면 죽음으로 탱크를... 적선을 막아내는 선조들이 계심을 너무도 깊이 감사하며...

   오늘날 아직도 일신의 영광을 위해 헤메는 불쌍한 사람(?)... 그리고 조국이 아닌 자기
   자신만을 위해(?)... 또 당파만을 위해 싸우고 시끄러운 사람들(?)...

   아직도 우리에겐 묵묵히 말없이 자기 할 일만 열심히 하는 산업전사들이 있음에...
   마음을 안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해독식품...감자


   감자  

   물 중독의 독성을 빼준다

   감자는 콜레스테롤의 수치를 떨어뜨리고 산중독을 없애주며 체내에 쌓여 있는 불필요한
   수분을 배출시키는 작용을 한다. 또 농약 같은 독성이 강한 약물 중독을 해독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01_이런 식품과 함께 먹어요
    감자는 우유와 궁합이 잘 맞는데 감자에 부족한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해주기 때문이다.
    또한 산성식품인 돼지고기와 생선 등을 먹을 때 감자를 함께 먹으면 감자의 알칼리 성분
    이 중화시키는 작용을 한다.

   02_이렇게 먹어야 효과 있어요
    해독효과를 높이려면 감자를 갈아서 즙을 내어 먹는다. 그러나 감자를 생으로 먹는 건
    한계가 있으므로 가능하면 껍질을 제거하지 않고 그냥 조리하거나 쪄 먹는 등 조리법에
    신경 쓴다.

   03_이렇게도 즐겨요
    감자를 생으로 먹는 방법 한 가지. 최대한 곱게 채 썰어서 식촛물에 담갔다 꺼낸 뒤
    깻잎채, 부추 등의 채소를 섞어서 먹는다. 이 방법은 해독 효능을 높이는 효과도 있다.

   감자고추장찌개

 


   재료
    감자 2개, 돼지고기 150g, 우거지 150g, 양파 1/4개, 다진 마늘 1큰술, 대파 1/5대,
    고추장 2큰술, 물 3컵, 소금·후춧가루 약간씩

   만들기
    1. 감자는 껍질을 벗긴 다음 3cm 크기로 썰어서 물에 담가 전분기를 뺀다.
    2. 돼지고기는 잘게 다지듯이 썰고, 우거지는 5cm 길이로 자른다.
    3. 양파는 0.5cm 크기로 채 썰고 대파는 어슷하게 썬다.
    4. 냄비에 돼지고기를 볶다가 물, 감자, 고추장을 넣어 끓인다.
  
   여기에 우거지, 마늘, 대파를  넣고 소금, 후춧가루로 간을 맞춘다.


비목... 가곡의 유래!


   1964년, 강원도 화천군 백암산 계곡,비무장지대 (평화의댐 북방 14km 휴전선 부근)를
   순찰하던
한 청년 장교가(한명희,당시 25세. 소위, 전 서울시립대 교수)잡초가 우거진 곳
   에서 이끼 낀 
무명 용사의 돌무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6.25때 숨진 어느 무명 용사의 무덤인 듯 옆에는 녹슨 철모가 딩굴고 있었고, 무덤 머리의
   십자가 비목(碑木) 은 썩어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보였습니다. 녹슨 철모, 이끼 덮인
   돌무덤,
그 옆을 지키고 있는 새 하얀 산목련, 화약 냄새가 쓸고 간 깊은 계곡을 붉게
   물들이는 석양.

   그는 돌무덤의 주인이 자신과 같은 젊은이였을 거라는 깊은 애상에 잠깁니다. 4년 뒤 당시
동양방송(TBC) 에서 일하던 한명희 PD에게
평소 알고 지내던 장일남 작곡가는
(한양대 음대 명예교수, 2006년9월 별세) 가곡에 쓸 가사 하나를 지어 달라 부탁했습니다.

     돌무덤과 비목의 잔상이 가슴 속에 맺혀 있던 한명희 PD는 즉시 펜을 들고 가사를 써
   내려갔습니다.
조국을 위해 산화한 젊은 넋을 기리는 "비목"의 가사는 이렇게 탄생
   되었습니다.
 

                            

   이 노래는 70년대 중반부터 "가고파", "그리운 금강산"과 더불어 한국인의 3대 애창곡
   으로
널리 불려지기 시작했습니다.
"초연(硝煙)이 쓸고 간 깊은 계곡 양지녘에 비바람 긴
   세월로 이름 모를 비목이여
---."


   가곡 "비목" 의 고향인 강원도 화천군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들이 아직도 이곳저곳에
   서려 있습니다.
6.25 당시 화천댐을 놓고 벌인 치열한 공방전으로 붉게 물들었던 파로호는
   지금 신록 속에 푸르기 그지 없고
,
군사 정권 시절 댐 건설의 필요성을 놓고 논란이 일었던
   평화의 댐은 민통선 바로 앞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댐 옆에는 가곡 "비목" 의 탄생을 기념하는 '비목공원'이 들어섰습니다 파로호는 호수
   모양이 전설의 새 대붕(大鵬) 을 닮았다고 해서 원 이름은 대붕호(大鵬湖)였답니다.

   그러던 것이 1951년 화천댐 공방전에서 국군이 중국군 3개사단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자 훗날 이곳을 방문했던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적을 격파하고 포로를 많이 잡았다"
   는 뜻으로"파로호(破虜湖)" 라는 새 이름을 지었다고 합니다.

   파로호는 1944년, 화천댐 건설로 생긴 인공호수로 산 속의 바다라고도 불립니다.
   호수에는 쏘가리, 잉어 등 70여종의 민물고기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파로호 경치가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대는 화천읍에서 평화의 댐으로 가는 460번 지방도
   오른쪽에 있습니다. 파로호 휴게소에 차를 대고 5분 정도 걸어올라가야 합니다.
   비목공원은 1998년, 가곡 '비목' 을 기념해서 만들었습니다. 산비탈에 돌로 한반도 모양의
   단을 쌓았고
곳곳에 돌무덤과 비목을 세웠습니다.

   주차장 입구에 "비목" 노래비가 서 있어 방문자들은 누구나 한번씩 그 앞에 서서 가사를
   되새겨 본다고 합니다.
화천군에서는 매년 6월 3일부터 6일까지 이곳 비목공원과 화천읍
   내 강변에 들어서있는 붕어섬 등에서 "비목 문화제"를 개최합니다.

   진중가요, 시낭송 등으로 짜여진 추모제, 비목깎기 대회, 주먹밥 먹기대회, 병영체험, 군악
   퍼레이드 등이 나흘간 펼쳐진다고 합니다. 거기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산자락이 마치 톱니
   바퀴처럼 맞물렸고 그 사이로 북한강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근래 호랑이 발자국이 발견됐다고 해서 주목을 끌었습니다. 조국을 위해
   희생한 비목의 주인공과 많은 선열들의 숭고한 넋을 생각하며 "비목"의 가사를 다시
   되새겨 봅니다.
  작년(2009년)... 퍼온 글입니다.







           
    
 
   메조 소프라노 백남옥
 

 

 

  • 탄곡 탄곡
    • 탄곡
    • 2010년 6월 25일 오후 7:32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10살 때, 국민학교 3학년에 6.25가 터져 휴학하고 피난가고 먹을 것 찾아 산으로 들로 헤매고...
    그리고 1962년 군입대하여 백암산 밑에서 GOP 근무를 하며 비목과 같은 장면 많이 봤지요.
    교육계로 초소마다 다니며 교안 나눠주고, 엊그제 같은데 제대한지도 45년이 지났습니다.
    내일 비가 온다지만 열심히 응원해야겠지요.
    • 화석 화석
      • 화석
      • 2010년 6월 25일 오전 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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