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2. 26. 13:24ㆍ나의 문학작품
우리 님들 혹시 그림 그리기 좋아하세요?
고란초가 과거에 유화 그림을 배울 때 일어났던 일들에 관해서
간략히 써본 글을 한 번 올려보겠습니다.
사실은 이로 인해 인물화와 누드 그림을 그리게 된 동기도 되었구요.
이제 소개할 글은 제가 유화를 그릴 때의 이야기들입니다.
이 글도 약간 길어 2편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 님들의 양해가 있으시길 바라고 즐겁게 감상하세요.
- 고란초의 컴퓨터 마우스 습작 그림집에 있는 누드입니다.-
어느 모델
(제1편)
점점 깊어만 가는 밤, 나 홀로 창가에 쓸쓸히 기대앉아 술 한 잔에 시름을 달래보고 있다. 어느덧 몇 잔의 술을 비우고 난 후 나의 머릿속이 점차 몽롱하게 변하면서, 입가에 내품는 뿌연 담배 연기가 지금은 떠나버린 어느 모델의 모습을 그려대며 나의 눈앞에 어렴프시 나타났다간 사라져간다.
지금쯤 어느 곳에서 무얼 하고 있을까?
나의 숱한 인물화 그림 속의 모델이 되어주었던 여자들이여! 풍만한 육체를 자랑하던 술집접대부, 생기발랄했던 누드모델 아가씨, 아름다운 꿈을 꾸고 있는 듯한 어린 소녀, 지금쯤 남편의 따스한 사랑을 한 몸에 듬뿍 받고 있을 어느 여의사 등등 …
나의 그림 속 모델들은 그 누구라도 내가 느끼는 감정은 동일하다. 그들은 모두가 평범한 예술품인 것이다. 즉 그림 속에선 지위의 고하도 없고, 빈부의 차이도 없으며, 오직 아름답게만 느껴지는 신의 조각품들처럼 보인다.
인체의 누드 그림을 그리거나 감상하면서 성욕을 느끼는 것은 그림의 세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행하는 처사라고 여겨진다. 진정 그림을 애호하는 사람이라면 아무리 멋지고 색시하게 생긴 여성의 그림이라 할지라도 하나의 작품으로, 하나의 예술품으로 여길 것이니까 말이다.
화가는 어느 대상 인물을 나부로 만들어보기도 하고, 화사한 옷을 입혀보기도 한다. 즉 자기 생각대로 작품 구상을 하게 되는 것이며, 어떤 여성이라 할지라도 단지 인류 태초의 이브 모습만 빌렸을 뿐 나머지는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생각하고 표현해볼 수도 있는 것이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는 시간만큼은 무아지경 속을 헤매며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만 같은 착각 속에 빠져 내 자신도 모르게 그림 속에 몰입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어느 순간엔 나도 모르게 모델들이 그려진 그림과 눈으로만 은밀한 대화를 나누며 한 밤을 지새우는 경우도 있었다.
어느 밤, 술 한 잔이 그리워질 때면 지금은 떠나가고 없지만 그 당시 그림 속의 모델이 기거했던 어느 술집으로 발길을 향하는 경우도 있었다.
지난 어느 날 일이다.
그 땐 사실 나도 술 한 잔보단 그녀 얼굴이라도 한번쯤 보고 싶어서 찾아갔었는데, 그녀도 내가 그림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을 차츰 알게 되었다. 그 무렵 나도 한창 유화를 배우고 있을 때였고, 화실에서 인물 모델들을 그려보는 데만 온정신이 팔려있을 때였다. 그런데 나도 모르게 내 곁에 앉아 술을 따라주던 접대부 여자를 한 번쯤 그려봤으면 하는 충동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몇 번인가 그녀에게 내 모델이 되어줄 수 없겠느냐고 정중히 부탁을 했다. 그렇지만 그녀는 계속해서 완강히 거절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그녀가 옷을 훌훌 벗어 던지더니 자길 한번 그려보라고 하지 않는가?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바뀐 것이다.
“오빠가 절 그려보고 싶어 하는 걸 저도 알고 있어요. 이젠 마음대로 그려보세요. 기꺼이 오빠의 모델이 되어 드릴게요.”
자신의 치부까지 남에게 서슴지 않고 들어내 보이며 자기를 그려주길 원하고 있는 그녀가 나의 눈엔 너무도 애처롭게만 보였다.
“저 같이 천한 몸뚱이도 예술 작품이 될 수만 있다면… ”
“너의 몸은 절대로 천하지 않아. 남녀 목욕탕에 한 번 가보라고. 거기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친 사람들뿐이지. 그들 중엔 갑부도 있을 수 있고, 거지도 있을 수 있어. 그러나 그들은 모두 다 똑같은 사람들일 뿐이야. 벌거벗은 몸뚱이에는 귀천이 따로 있을 수가 없다고. 그러니까 천한 나부는 이 세상에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리고 내 눈에는 모두가 예술 작품으로만 보이거든.”
‘그래, 네 마음을 모르는 내가 아니야. 난 너를 내 성적 만족을 위한 도구로 여겨본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말이야. 그래서 그 동안 난 너의 털끝 하나 건들지 않았었지. 너의 몸은 바로 태초의 이브요, 예술의 극치가 아닐까?’
난 그녀로부터 내 마음 한 귀퉁이에 자리 잡은 환상적인 이브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며 여성의 나부가 바로 예술품인 동시에, 조물주가 창조한 모든 미(美)중 가장 극치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여겨졌다. 그래서 그녀를 정신을 잃고 바라보며 심혈을 기우려 스케치해보면서, 밤이면 그녀의 모습이 보고파 그림 속의 그녀와 무언의 대화를 즐기지 않았던가?
발가벗은 여체 앞에서 어찌 성적 충동을 느껴보지 않은 남자가 있을까만, 단지 너의 모습만을 지켜보며 널 예술품으로 승화시켜가는 나의 마음속엔 네가 지닌 성적인 매력이라곤 털끝만큼도 느껴볼 수 없었고, 오직 하나 너의 완벽에 가까운 몸매에서 나의 모델로써는 너무나도 과분하다는 느낌만 받았고, 화가도 아닌 나를 화가로 착각하게 만들며 결국 잘 그려내지도 못함만을 탓할 뿐이었다.
지금 술잔에 어리는 너의 모습을 바라보며 이제부터라도 나도 뭔가를 이뤄내야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굳게 해본다.
그림 속의 모델들은 희미한 자취만을 남긴 체 내 곁을 떠나갔지만, 나로 하여금 무언의 대화라도 나눌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 그들이 보고 싶고, 속삭이고 싶고, 만져보고도 싶으며, 그리워질 때면 그들의 모습이 담긴 그림 앞에 서보면 내가 하고자하는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에게 연민의 정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들을 바라만 보고 싶을 뿐이다. 사실 그들은 나와 같은 무명의 화가에게 자신의 모습을 서슴지 않고 내보이며 그려보라 하지 않았던가? 난 그로인해 내 생활의 활력을 찾았고, 그들은 나로 하여금 예술 세계를 알 수 있도록 해주었으니 정말 고맙게 여겨질 뿐이다.
지난 어느 날이었다. 내가 그림의 매력에 심취하여 난생 처음으로 그림을 배우고자 K선생님의 문하생으로 들어갈 때였다. 그 당시 그 곳엔 7∼8명의 제자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각자의 그림 그리는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들이 그리는 그림들은 상당한 수준에 도달된 듯했다.
‘어떻게 하면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을까? 난 아무 것도 모르는 초보자인데 저 사람들과 어찌 어울릴 수가 있단 말인가?’
나는 나도 모를 고민이 생겨나는 것을 느꼈다. 그렇지만 용기를 가지고 K선생님을 대면하게 되었다. 나의 모든 과거지사를 말씀드리고, 나의 소개를 한 후 그림을 배우러 왔다고 했다.
“나에게 그림을 배우겠다고? 그럼 그 동안 그림을 그려본 적이 있었던가?”
그 분은 머리가 허옇고 연세도 지긋해보였지만 지금까지 국전이며 목우회전 등에서 다수의 특선과 입선을 하신 적이 있고, 이곳에선 서양화 부문엔 명성이 높은 분으로 널리 알려진 중진화가이셨는데, 나를 지긋이 내려다보시며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제게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해주신다면 여한이 없겠습니다. 수채화나 파스텔화 같은 것은 그려봤지만 유화는 처음이라서 어떻게 선생님의 가르침을 따라 갈 수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최선을 다해 가르치신 대로 그려보겠습니다.”
난 그 분께 나의 각오 등을 말씀드린 후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정 나에게 배우고 싶다면 자네가 그린 그림 중 잘된 거라고 생각되는 작품 한 두 점만 가지고 와 보게.”
사실상 나의 수준은 그 분께 배울만한 정도까진 오르지 못했지만, 단지 배우고 싶다는 욕심만으로 찾아 왔던 것인데 졸지에 이런 제안을 받고 보니 다소 난감해짐을 금치 못했다.
“잘 알겠습니다. 그럼 내일 다시 뵙겠습니다.”
그 분께 인사를 드리고 문을 나설려는데,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낯선 남자가 한 손에 유화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를 들고 굽실거리며 K선생님 앞에 나타났다. 그도 나처럼 그림을 배우려고 온 것 같았다. 그동안 몇 번인가 찾아왔던지 다소 안면이 있는 듯 K선생님께 깍듯이 인사를 하며 캔버스를 내미는 것이었다.
나도 다소 궁금하여 발을 멈춘 체 상황을 지켜보았다. K선생님께선 그가 내민 그림을 한 손으로 받더니 죽 훑어보고 나서 고개를 좌우로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냅다 그 그림을 집어던지더니 한 소리 내뱉으셨다.
“이게 어디 그림이라고 그린건가? 자넨 10여 년 동안 유화를 그렸다고 했지? 그럼 모든 그림이 이 정도란 말인가?”
“그러니까 선생님께 이렇게 배우러 오지 않았습니까? 제발 좀 가르쳐 주십시오.”
그는 얼굴이 벌게지며 K선생님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애원하는 것이었다.
“그림을 이따위로 그렸다면, 그것도 10년이 넘게 이런 그림만 그렸다면 자넨 그림 그릴 자격이 없는 것 같네. 왜냐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는 없기 때문일세.”
K선생님께선 오히려 나무라듯이 그에게 말했고, 그도 얼굴을 푹 숙인 체 찍소리도 못하고 듣고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의 의도는 일언지하에 묵살 당했고, 그는 그림을 감추듯 팔에 낀 체 황급히 방을 나가버렸다.
“저런 그림이 관청이며 유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팔리고 있다니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지. 허허! 참.”
K선생님께선 혀를 끌끌 차며 소태 씹은 표정을 짓고 계셨다. 난 그곳을 조용히 빠져나왔는데 꼭 내 일만 같았고, 내가 당하는 것만 같았다.
‘이거 큰일났군. 나도 앞으로 그림 같지 않은 그림을 가지고 와야만 하는데 저 사람보다 더한 욕을 먹지 않을는지 모르겠어. 이러나저러나 어찌해야만 할까? 그림 배우기가 이다지도 어려운 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어.’
난 속으로 중얼거리며 내일 벌어질 일들을 머릿속에 그려보며 한숨만을 쉬고 있을 뿐이었다.
다음 날 저녁 난 유화인지 수채화인지 구별이 어려울 정도로 그려놓은 독도의 바닷가 절벽이 있는 해안 풍경을 한 점 가지고 K선생님을 찾아갔다. 물론 통과되긴 틀렸다고 여기고 아무런 부담도 없이 면접을 받는 수험생마냥 그 분 앞에 다소곳이 서서 판정만을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내가 내민 그림을 보시던 그 분의 표정이 그리 밝아보이진 않으셨다. 한참 동안을 이리저리 훑어보시더니 나를 향해 한 마디 하셨다.
“유화는 처음이라고 했던가?”
“네, 그렇습니다. 수채화만 그리다보니 유화를 제대로 그리지 못했습니다. 새로 배우고 싶습니다.”
“그런대로 구도는 잘된 편이군. 하지만 색감이 잘못된 것 같아. 나한테 색감만 잘 익힌다면 괜찮은 그림을 그려낼 수 있겠어.”
‘와! 그렇다면 절 뽑아 주시겠다는 말씀 아니신가요? 어제 그 사람의 그림은 내동댕이쳐버리셨는데, 혹시 제 것도 그러실까 얼마나 마음 조렸는지 아십니까?’
난 일단 마음이 놓였는데 그 분께선 아직 정식으로 배우란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난 조용히 그 분의 의향을 떠보았다.
“아직 너무나도 잘 모릅니다. 그렇지만 가르쳐만 주신다면 열심히 익히고 배워 선생님을 실망시켜 드리지는 않을 생각입니다. 그럼 제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자넨 내일부터 그림 그릴 준비를 하고 내 화실로 나오게. 그 대신 열심히 해야만 하네.”
상상외로 그 분의 제자가 쉽게 되고 말았다. 그 다음 날부터 그 분의 화실을 들락거리며 그림 그리는 작업에만 몰두하며 그 분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다. 그 분의 제자가 되어 그림을 그리면 더 쉽게 그려질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어려운 게 그림 배우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내내 병원 근무 하느라 환자에게 시달린 몸을 이끌고 저녁 식사가 끝나기 바쁘게 그 분의 화실로 달려가 밤늦도록 꼿꼿이 선 체, 그림 그리는 작업에만 몰두하며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야만 했다. 또한 그 분 앞에서 그림 작업을 하는 동안만큼은 절대로 앉아서 그려서는 안 되었다. 정신 집중이 안 된다는 게 주된 원인이었고, 만일 앉아서 작업을 했다가는 그 날부터 퇴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서서히 그림의 색감이 달라지기 시작했고, 그 분 제자들의 그림과 자연스럽게 비교가 되면서 그들과 비슷해져가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
우리 님들, 잘 감상하셨나요?
그림 그리기가 생각보다는 어렵겠죠?
1편은 제가 그림을 배우러 들어가는 과정을 간단히 소개해드렸습니다.
그 후에 모델과 관련된 이야긴 제2편에 올려드리겠습니다.
우리 님들 오늘 하루도 즐겁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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