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화가(老畵家)의 눈

2011. 3. 11. 14:50화가의 인생이야기

 우리 님들 이제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를 좀 다루어볼까 합니다. 어찌보면 슬픈 인생이고 가난에 쪼들려 마지 못해 사는 인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술을 향한 정렬과 끈기는 타의 귀감이 되기도 합니다.
 그 첫번째는 어느 노화가의 눈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시고 이 화가의 이름을 맞춰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은 이 글의 맨끝에 있습니다.





 

       어느 노화가(老畵家)의 눈




 키도 자그마하고 부끄럼을 잘 타는 노화가(老畵家)가 있었다.

 그는 아랫입술이 불룩 튀어나왔기 때문에 입매가 언제나 뾰루퉁해보였다. 윗입술과 턱은 아무렇게나 자란 수염으로 덮여 있었으며, 푹 꺼진 양 볼은 쭈글쭈글하고 혈색이 나빴다. 전체적으로 일흔 여덟의 노인답게 피곤한 모습이었다. 적어도 광채가 흐르는 커다란 두 눈을 제외하고는 그랬다. 그의 눈은 여든에 가까운 노인의 눈이라기엔 너무도 총총했다. 오히려 어린아이에 가까운 눈이었다. 눈가의 누르께한 피부를 태워버릴 듯이 청청하게 타오르는 불꽃이었다. 죽음의 시각이 다가와도 꺼지지 않을 듯이, 육신이 스러져 없어진 다음에도 이 세상 어디엔가 홀연히 나타날 것만 같이 그렇게 빛나는 눈이었다.

 노인은 지금 휠체어에 앉아 있다. 몸은 고대의 양피지 조각처럼 쪼그라들었고, 지독한 류머티즘 때문에 팔, 다리, 발, 어디고 수술하지 않은 데가 없었다. 바짝 마른 양손은 죽어가는 노송 뿌리처럼 뒤틀려졌다. 손가락이 오그라들어 아무 짝에도 쓸모없게 생겼고, 손톱이 살에 파고들지 못하도록 붕대까지 감고 있었다.

 오른손 엄지와 집게손가락 사이에다 붓을 들고서 노화가는 무진 애를 쓰며 이젤에 놓인 캔버스 위에 붓을 움직인다. 몇 번 붓을 놀린 다음 새 붓을 집으려고 하나 팔을 뻗을 엄두가 안 나서 쓰던 붓을 테레핀 기름에 씻어낸다. 운필하는 팔 동작이 기계적이고 유령처럼 힘이 없다. 그나마도 붓을 움직이도록 하는 것은 형형한 안광인 듯하다. 노인은 눈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 눈으로 지켜보고 괴로워했던 모든 얘기를 기록하기 위해 눈은 그렇게 빛나고 있는 듯했다. 그 노화가는 얼마 전에 가장 다정하고 상냥스러웠던 아내가 마지막 길을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죽음의 신비와 삶의 괴로움을 지켜본 사람, 오랜 방황과 슬픔의 세월 끝에 노인은 마침내 인생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영감어린 스테인드글라스의 유리창을 통해 구원의 대성전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있었다. 대성전 안에는 으레 그러리라 기대했던 모습이 내비쳤다. 조그만 어린이가 제대 앞에 엎드려 기도하는 모습이… 


노화가가 젊었을 때였다. 그는 벨라스케즈의 작품 ‘브레다의 항복’을 보고서 너무나 감동을 받아 캔버스에 그려진 인물들을 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그는 그 후로 화가의 붓끝으로부터 퍼져나오는 환희의 비밀을 배웠다. 그 화가에겐 그림이란 여인처럼 생생하게 살아있는 대상이었다.

 “그림에 가까이 다가가 어루만지는 게 얼마나 즐거운지! 화가는 손재주가 좋은 장인 정도로는 어림도 없지. 자기 그림을 애무할 줄도 알아야 해.”

 그가 자기의 작품을 즐겨 어루만지면서 하는 말이었다. 그 당시 그의 작품이 염치없이 관능적이라는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그 자신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였다.

              

                  - 이 화가가 1905년에 그린 '다리를 꼬고 앉아 목욕하는 여인'입니다. 
                 이 그림은 디트로이트 인스티튜우트 오브 아트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그는 목욕하는 여인의 누드를 즐겨 그렸는데, 모두가 살집이 탄탄히 오르고 사지가 튼실하고 풍만한 여인들이었다. 그의 한 친구는 “여인을 그리는 일이 여인을 포옹하는 것보다도 더 그 화가를 흥분시켰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사회는 인체에 대한 그의 노골적인 예찬에 충격을 받았다. 당시에 비평을 보면 “이 화가가 그린 나부의 그림은 탐욕의 동산이다. 푹신푹신하게 바람을 넣어 부푼 듯한 풍만한 여체들이 불그스름한 오일로 얼룩진 체 뭉클하게 농익어가는 과수원 같다.”고 혹평하였다. 또 다른 비평가는 “사랑에 두 가지 종류가 있듯이 예술에도 두 가지 형태가 있다. 그런데 이 화가 특유한 사랑의 형태는 아름답기는 해도 대단한 예술은 아니다.”라고까지 했다.

 이 화가는 통상적인 의미의 관능주의자(官能主義者)는 아니었고, 그보다 훨씬 더 높은 차원에서 관능을 미로 승화시킨 천재였었다. 그는 예술의 찰나적인 효과나 개인적 이용 가치 때문이 아니라 예술이 지닌 본래의 가치 때문에 그러한 창조행위를 사랑하였다. 모델을 가늠하는 그의 눈매에는 음란한 빛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는 모델의 진가를 모델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출발점으로 평가하였다.

 “모델은 시동을 거는 역할을 한다. 모델이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들을 감히 시작하게 해주는 것이다.”고 그는 말했다.
 여인의 아름다움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그의 관능미는 그보다 훨씬 더 감각적이었다. 

 “나로서는 어떤 불한당을 그린다 해도 문제가 없다. 다만 광선이 잘 먹혀드는 피부의 소유자이기만 하면 된다.”라고 그는 또다시 말한다.

 일반적으로 감각적인 사람들은 반드시 비종교적일 것이라고 믿는 경향이 있는데, 그건 틀린 생각일 것이다. 특히 위대한 예술가나 철인인 경우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 화가는 독실한 신자였다. 그는 고대 예술의 강점은 예술가의 신앙심에 있었다고 의견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들에게는 신이 항상 존재했다. 인간은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그리스인에겐 아폴로와 미네르바가 있었고, 지오토 시대의 화가들에게는 천상의 수호자가 있었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자만심에 눈이 어두워 그와 같은 신과의 유대를 거부하려 하고 있다. 그건 신에 의탁하는 것이 자기 비하 행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신을 추방했고 그렇게 함으로써 행복의 기회 또한 추방해버렸다.”

 현대화가 중 가장 자극적인 누드를 그린 이 화가는 정신적으로는 누구보다도 철저한 금욕주의자였었다.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양손이 마비되어 전혀 일을 못 할 지경에 이르러서도 그의 눈은 미를 추구했다. 마지막 수년은 고통에 신음하면서 휠체어에 앉아 보내야만 했다. 그런데도 얼굴에는 알 수 없는 푸근한 미소가 감돌았다.

 “한자리에 꼼짝달싹 못 하게 됐으니 나는 참 운이 좋은 사람이다. 이젠 그림을 그리는 일 밖에 못 할 테니까.”하고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러면서 번쩍이는 눈으로 덧붙여 말하기를 “게다가 그림을 그리는 데는 반드시 손이 필요한 건 아니야.”라고 하는 것이었다.

 그는 생의 마지막 날까지 고통 속에서 미를 창조하는 작업을 계속했다. 1919년 12월 17일 그는 거의 2주간을 기관지염을 앓은 끝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젤 앞에 앉아 꽃병을 그릴 채비를 차렸다.

 “연필을 주게.”하고 그는 시중하는 하인에게 청했다. 하인이 연필을 가지러 옆방으로 갔다가 와보니 화가는 이미 숨져 있었다.

 바로 이 노화가는 '피에르 오귀스트 르노아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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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그림을 보시면 화가 이름을 쉽게 맞출 수가 있지요.
이 글은 헨리 리 토머스의 '위대한 화가들'을 많이 참고하였습니다.
  우리 님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