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들의 장난

2011. 3. 11. 14:52화가의 인생이야기

 우리 님들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 두번째는 '신들의 장난'입니다. 인생이 정말 처참했던 한 화가의 삶이 마치 신들에 의한 장난처럼 보였기 때문에 제목을 이렇게 붙여봤습니다.
  우리 님들 이 화가의 인생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보시죠.
 아울러 이 화가가 누구인지도 한번 생각해보세요. 정답은 이 글의 맨끝에 있습니다.




 

                                             신들의 장난





 이 화가가 그린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사람의 아들이었다.

사람의 아들이라니, 이 화가도 그 때까지는 사람의 아들 중에서 제법 괜찮은 축이었다. 세상은 그를 잘 대해 주었다. 그의 그림은 생의 기쁨이 넘쳐흘렀고 슬픔은 밑바닥에 가려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저 밑에 깔렸던 슬픔이, 그림에서는 아닐지라도 그의 실생활에서 점차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의 아내 사스키아는 세 아이를 낳았는데 둘은 아직 애기일 때 죽었다. 그리고 결혼 8년만에 그의 아내도 병을 얻어 세상을 떠났다.

                                      

                                         - 화가의 아내였던 '사스키아'의 자화상입니다. -

 아내의 죽음은 그의 행운이 다했음을 의미했다. 마치 로켓처럼 그의 빛은 높이 솟아올랐다가 일순에 덧없이 사라지고, 그는 어둠 속에서 허공에 떠있었다. 아내를 잃은 해에 그는 고객도 잃게 되었다. 그가 고객의 인기를 잃게 된 비극적인 중에도 희극적인 면이 있다. 암스테르담의 부유한 시민들은 유머 감각보다는 체면을 더 중시하는 사람들이었는데, 이 사람들이 이 화가에게 멋지게 군복을 차려입은 자기들의 모습을 그려달라고 주문해왔다. 후일 ‘야경꾼’이란 이름으로 유명해진 이 그림이 고객들의 노기를 충천케 한 원인이 되었다. 그들이 그렇게 화를 낸 이유는 실은 이 그림이 너무 훌륭한 데 있었다.

               

                              - '야경꾼'이라는 제목의 명화입니다. -

 그는 인물들을 한 줄로 죽 세워놓고, 공평하게 그리지 않고 예술적인 통일을 이루기 위해 여러 집단으로 나누어 배치했던 것이다. 그 결과로 나온 것이 구성상의 위대한 걸작과 불만에 가득찬 고객들이었다. 어떤 사람은 환한 불빛을 받고 있지만 어떤 사람은 반은 불빛 속에, 반은 그늘 속에 있다. 그런가하면 아예 그림자처럼 처리된 사람도 있다. 이 사람들이 모두 자기 초상의 대가로 똑같이 값을 지불한 터였다.

 그런데 어쩌자고 이 화가는 모두들 똑같이 잘 보이게 그리지 못한단 말인가? 이에 대해 그는 자기는 예술가이지 인구조사원이 아니라고 내쏘았다. 자기의 본분은 미를 창조하는 것이지 남의 머리 수나 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 대답은 지당한 말씀이나 장삿속으로는 지당치 못했다.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라는 제목의 명화입니다. -

  그 후 주문이 점점 떨어져나가기 시작했고, 그는 더욱더 자기 마음대로 그렸다. 주문도 없으니 이제는 부자들의 변덕과 허영심에 맞추어 그릴 필요도 없었다. 처음으로 그의 예술은 어디에 구속되지 않은 채 분방한 화가의 개성을 표현할 수 있었다. 그는 자유를 얻었지만 그 대신 생계를 잃고 말았다.

                                    

                                          - 화가의 정부 '헨드리케 스토펠'의 자화상입니다. -

 그때부터는 걷잡을 수 없는 내리막길이었다. 생활을 사랑하고 특히 가정생활을 사랑하던 그는 새로운 여인 헨드리케 스토펠을 맞아들였다. 그러나 아내로 만들지는 못했다. 사스키아가 만약 그가 재혼하면 외아들 타이터스의 양육권을 잃도록 유서로 조처해놓았기 때문이었다. 이 화가가 정부로서 자기 집에 들여놓은 여인은 어느 모로 보아도 그에게 손색이 없었다. 그러나 암스테르담의 시민들과 특히 사스키아의 친척들에게는 그를 괴롭힐 구실이 한 가지 더 늘은 셈이 되었다. 그들은 소극적으로 그를 무시하던 방법에서 적극적인 박해로 나섰다. 그의 인격을 먹칠하고 집을 빼앗았으며, 마침내 억지 파산 선고를 시켰다. 그는 유태인 빈민가의 비좁고 비위생적인 처소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의 예술은 더욱 높이 승화되었다. 전에 행복한 시절에는 부자들의 허영스런 모습을 그렸지만, 이제는 가난한 이들의 소박한 삶을 그렸다. 그가 ‘장님 토비드’의 에칭을 제작할 무렵 그 자신의 눈도 어두워지고 있었다. 그의 장기인 세부 묘사를 제대로 해내려면 이제 그림을 실물보다 크게 그려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의 예술의 특징인 예리한 필치는 서서히 돌이킬 수 없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렇지만 많은 비평가들이 그의 최대 걸작이라고 평하는 유명한 ‘직물 상인들’( ‘조합원들’이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짐)을 제작한 시기도 바로 이때였다. 그가 ‘조합원들’의 초상을 주문 맡을 수 있던 것은 오로지 아직도 그를 아끼는 친구들의 노력 덕분이었다. 쉰다섯의 나이에 몸은 이미 겉늙어 버렸지만 화가로서의 그의 재능은 한창 완숙기에 들어서 있었다.

 이 그림으로 해서 번 돈도 밑 빠진 독 같은 그의 부채가 삼켜버렸다. 몇 년 전만 해도 부르는 게 값이던 그의 그림들이 이제는 할인판매의 대상이었다. 변덕스런 세상 인심이란 게 늘 그런 것이어서 사겠다는 사람도 나서지 않았다.

  아들 타이터스가 헨드리케 스토펠과 동업으로 화방을 차렸지만 그렇게 해서도 그림을 처분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너무 일찍 유명해진 사람의 쓰라린 운명을 맛보았다. 생전에 자신의 명성이 죽고 매장당하는 꼴을 두 눈으로 보아야 했던 것이다. 죽기도 전에 그는 이미 잊혀진 과거지사가 되어버렸다.

             

                           -이 화가 노년기의 자화상입니다. - 

 이 시기에 동판에 새긴 이 화가의 자화상이 남아있다. 창가에서 그림을 그리는 모습이다. 수놓은 외투와 허리의 칼도, 멋 부린 콧수염도, 모자도 사라지고 장난스럽게 반짝이는 눈매도 찾아볼 수 없다. 구깃구깃한 낡은 작업복을 걸쳤고 숱이 성글어 가는 머리엔 엉성한 모자를 덮어 썼다. 고생에 찌든 부석부석하고 비감한 얼굴엔 고통스런 세월의 흔적이 역연하다. 그러나 결연한 입매는 선이 뚜렷하고 아직도 자신감에 차있다. 무엇이 닥치든 끝까지 싸우리라.

 그는 끝까지 싸웠다. 그러나 허사였다. 숨 돌릴 새도 없이 불행이 꼬리를 물고 그를 찾아왔다. 헨드리케가 병이 들어 생명이 위태로웠다. 그는 걱정스레 그녀의 병상을 지키며 의사에게 지불할 돈을 마련하지 못해 애를 태웠다. 헨드리케는 잠시 회복되는 듯 하더니 다시 몸져누워 끝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연인의 장례비용을 마련하기 위해서 그는 아내의 유해가 안치된 납골당을 팔아야 했다. 그러나 불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나 남은 아들 타이터스도 세상을 떠났다. 젊은이가 결혼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때였다.

 그 화가는 아들의 며느리 마그달레나가 딸을 낳을 때까지 살아 있었다. 그들은 죽은 타이터스를 기념하여 아이의 이름을 티찌아라고 지었다.

 죽음, 가난, 비탄, 냉혹한 세상사 그리고 커다란 침묵. 신들은 이 화가를 가지고 노는 데 진력이 났다. 그들은 마침내 가엾은 생각이 들었는지 1669년 10월 4일 그가 눈을 감을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신들의 장난은 아직도 한 가지 더 남아 있었다. 신은 생전에도 이 화가를 소홀히 하더니 죽은 다음에까지 그에게 굴욕을 주었다. 값으로 따질 수 없이 귀중한 명화를 수백 점이나 후세에 남긴 이 사나이를 단돈 13플로린(약 오 달러 이십 센트)짜리의 빈민 묘지에 묻히게 했던 것이다.

 바로 이 화가는 ‘렘브란트 반 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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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정말 가난에 찌든 비극적인 화가였습니다.
이 글은 '위대한 화가들'을 많이 참조하였습니다.
  우리 님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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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석 2009.03.01  14:15 

네! 잘 읽었습니다. 연휴 직업성 잘 못쉬리라 생각됩니다만,

90년전에 일어난 그 운동이 중국, 인도, 필리핀, 이집트까지
독립의 물결을 일으키게 한 원동력이었습니다.

조상의 빛난 얼을 다시금 되새기는 하루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고란초님! 오늘 뜻깊은 하루가 되시길...

 joongjinbae 2009.03.02  15:20 

렘브란트에게 이러한 고통이 있었군요. 항상 어둡다고만 생각했었거든요.
감사합니다. 이렇게 해서 견문을 넓혀 갑니다.

 고란초 2009.03.03  09:19 

화석님, 방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남이 쉬면 대부분 근무하지요.
직업이 그러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ㅎㅎ
삼일절 기념도 해야하는데 환자 때문에 바쁘네요.
화석님, 항상 건강하시고 좋은 일만 가득하시길 빕니다.

 고란초 2009.03.03  09:23 

jj님, 방문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상 렘브란트도 불행한 화가의 한 사람이었지요.
말년이 엄청 불행했어요.
그래도 끝까지 예술을 사랑했고 불후의 명작들을 많이 남겼습니다.
jj님 이런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를 통해 그림을 조금이라도 더 잘 이해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만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ksera 2009.06.14  13:57 

안녕하세요^^?
처음입니다...

막연히 바라 본 렘브란트 그림들을 이렇듯 자세히 알고 나서 바라보니 색다른 느낌입니다!

그 유명한 돌아온 탕자의 그림등...도 새롭게 보여질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고란초 2009.06.15  11:13 

ksera님, 방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의 화가들의 인생 이야기를 읽어보셨나요?
유명 화가들도 불행했던 분들이 많아 이런 글을 연재하고 있거든요.
저도 사실은 유화를 그린 지 꽤 오래되었습니다. 그냥 아마추어로 그리는 것일 뿐 직업은 따로 있습니다.
화가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그 화가를 알아야만 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면 그림들이 좀 더 이해가 쉽고 달리 보일 수도 있습니다.
님께서도 항상 건강하시고 보람찬 주일을 시작하시길 빕니다.

 Catalina 2009.06.25  03:34 

네~고란초님.렘브란트의 일생은 정말 비참하군요?"
신들은 끝까지~그를 외면했고,,,
슬프기도 하지만.유명화가의 일생을 알게된 것에 감사드립니다.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란초 2009.06.25  11:18 

카타리나님, 방문에 정말 감사드립니다.
외국의 유명화가의 인생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주기도 하고 배울 점도 많습니다.
특히 가난에 찌든 화가일수록 그림에 대한 열정이 대단하더군요.
렘브란트도 그 중 한 분이셨지만...
비참한 인생을 살았지만 후세 사람들이 그를 유명한 화가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생전에 명성을 날리던 화가들은 거의 잊혀져가고...
카타리나님, 항상 건강하시고 하루하루를 충실하며 즐겁게 사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