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경영자들은 창의성과 혁신을 강조하는 추세입니다. 디테일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창의성을 억압하지 않을까요?
"아주 좋은 질문입니다. 모든 일에는 정도(程度)가 있어요. 작고 사소한 부분까지 모두 완벽한 사람은 이 세상에 없습니다. 모든 고객을 만족시키기도 불가능하죠. 하지만 디테일은 태도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일을 잘 해내고 싶은 욕구, 완벽함을 추구하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작고 사소한 걸 무시하면 만회할 수 없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있습니다. 천리 둑도 작은 개미구멍 때문에 무너집니다."
왕 소장은 중국 시장에서 대대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KFC에 도전장을 냈던 현지 패스트푸드 업체 룽화지(榮華鷄)를 예로 들었다. 1990년대에 이 업체는 "KFC가 가는 곳에는 우리도 간다"는 캐치프레이즈를 내걸고 중국 사람의 입맛에 맞는 메뉴를 개발하고 호기롭게 덤벼들었다.
이 회사는 초기에 반짝 실적을 올리기도 했지만, 6년 만에 수도인 베이징에서 사업을 접고 지방으로 철수하는 신세가 됐다. KFC는 양념 배합비율, 고기와 야채 써는 순서, 조리시간, 청소 순서까지 엄격한 규정을 만들어 직원을 교육하는 반면, 룽화지는 치킨에 뚜껑도 덮어놓지 않고 고객이 보는 앞에서 파리채로 파리를 잡았으니 경쟁이 될 리가 없었던 것이다.
■왕중추에 귀 기울이는 한국 경영자들
'대충대충'과 '적당주의'가 지배해온 한국에서도 왕중추 소장의 '디테일 경영론'에 귀를 기울이는 경영자가 많다. 이웅열 코오롱그룹 회장은 '디테일의 힘'을 대량 구매해 직원들에게 나눠주면서 "영업이든 관리든 빈틈없는 일 처리가 중요하다"고 했고, 장세주 동국제강 회장도 올 초 신입사원 94명 전원에게 이 책을 선물했다.
권영수 LG디스플레이 사장은 이 책에 대해 "지위가 올라가다 보면 '큰 그림을 본다'는 미명 아래 자꾸 작은 것을 놓치기 시작하는데, 그러면 매사에 정성이 없어져 결국은 큰 그림마저 놓치게 된다"는 소감을 밝혔다.
왕 소장은 실증적인 사례 연구라는 '팩트(fact)'를 통해 다수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그의 책이나 강연에는 항상 세계 유명 기업의 성공과 실패 사례가 빽빽하게 들어간다.
"제 책은 기업 현장에서 일어나는 실제 사례를 위주로 작성한 것입니다. 거창한 경영이론이나 통일된 개념 같은 건 없습니다. 그 대신 제가 현장에서 직접 보고 들은 사례가 생생하게 실려 있습니다. 중국 31개 성(省) 가운데 시짱(西藏·티베트자치구)만 빼고는 모두 다녀왔습니다. 해외의 경우 주요 연구대상인 일본을 자주 방문하는 편입니다.
도요타에 관한 책만 수십 권을 읽기도 했습니다.
"위대한 전략도 세세한 디테일에서 시작된다"는 왕중추 소장의 말에 중국 기업과 정부, 13억 인구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 2시간에 걸친 인터뷰를 마치면서 가슴이 답답해졌다. 거대한 스케일의 중국, 디테일에 강한 일본 사이에 끼어있는 우리나라의 장래가 걱정됐기 때문이다. 중국이 스케일에 디테일까지 더한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으로 경쟁할 것인가?
그동안 우리는 너무 대범하게 살아온 것이 아닐까?
바둑 격언 중에 '착안대국, 착수소국(着眼大局, 着手小局)'이란 게 있다. 대국적으로 생각하고 멀리 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행할 때는 한 수 한 수 집중해 세세한 부분까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왕중추 소장은…
중국 장시(江西)성 주장(九江) 출신으로 사범대학을 나와 7년여간 고향에서 중학교 국어 교사와 공무원 생활을 했다. 1992년 덩샤오핑(鄧小平)이 광둥성(廣東省) 일대를 돌며 개혁개방 정책을 강조한 남순강화(南巡講話)를 접하고 감명을 받아 기업에 투신했다. 선전의 기업체 영업직 말단사원으로 시작해 IT회사 임원, 화학회사 사장을 역임하면서 디테일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칭화(淸華)대 비즈니스스쿨에서 MBA 학위를 받은 뒤 학내 벤처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베이징대 부설 디테일경영연구소를 설립, 경영 컨설팅과 강연을 통해 중국 기업과 국민들의 의식 개혁을 설파하고 있다. 디테일 경영에 관한 책은 현재 6권까지 나왔다. 중국에서는 한꺼번에 9만 부를 주문해 전 직원에게 읽힌 대기업도 있다.
蛇足)
왕중추 소장은 "한국은 중국보다 디테일이 훨씬 강한 나라"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일본과 비교하면 한국 기업도 여전히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 한국 기업에 대한 조언을 한다면?
"한국은 공업화가 중국보다 빨랐고, 기업 임직원이나 CEO의 자질이 중국보다 높은 편입니다. 중국 기업이 배워야 할 점이 많지요. 하지만 한국 기업은 일본 기업을 더 많이 배워야 한다고 봅니다. 한국이 요즘 미국만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데 주의해야 합니다.
제조업이 나라의 기반인데, 금융만 강조하면 안 됩니다. 또한 사람을 쓰는 법, 사람을 판단하는 법은 중국 고대 철학에서 배울 점이 있습니다. 이 부분은 중국이 미국보다 앞선 측면이 있습니다."
- 디테일을 강화하는 비결이 있나요?
"만리장성은 하루아침에 쌓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장기간 반복 훈련을 해야 사람의 태도를 바꿀 수 있어요. 오른손잡이라도 꾸준히 왼손으로 필기하고 밥을 먹으면 우뇌가 발달하는 것과 마찬가지죠. 사고(思考) 자체를 바꾸기는 힘들어도 행동을 바꾸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렇게 해서 시간이 오래 지나면 사고도 변할 수 있죠."
- 그는 가정에서도 디테일을 따질까?
"제가 뭘 먹을지, 뭘 입을지는 아내가 다 정해줍니다. 간혹 음식이 맛이 없어도 저는 절대로 말을 안 합니다. 그래서 집에서는 싸울 일이 없어요.(웃음) 하지만 도덕이나 중요한 습관에 대해서는 원칙을 지킵니다. 회사원인 큰딸에게는 '다른 사람과 교류할 때 지켜야 할 36가지 원칙'이라는 글을 전해줬어요."
그는 "큰딸이 오늘 아침에 보낸 것"이라며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여줬다. 메시지에는 "회사 사람들이 왕중추의 딸이라며 큰 기대를 거는 게 부담스럽지만, 내가 자신감을 가지면 이런 걱정은 사라질 것"이라고 나와 있었다. 부전여전(父傳女傳)이라고나 할까.
1. 무엇을 볼 때는 잘못 본 것이 아닌지 생각할 것. 2. 무엇을 들을 때는 정확하게 알아들어야겠다고 생각할 것. 3. 항상 온화한 얼굴을 가져야겠다고 생각할 것. 4. 용모는 항상 조심스럽고 품위 있어야겠다고 생각할 것. 5. 말은 성의 있게 해야겠다고 생각할 것. 6. 일을 실행할 때는 신중해야겠다고 생각할 것. 7. 의문에 부딪혔을 때는 박식한 사람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할 것. 8. 화가 났을 때는 뒷일의 결과를 차분히 생각할 것. 9. 이익이 있는 일을 발견했을 땐 그것이 도리에 맞는지 생각할 것. (공자에게서 배웠습니다.)
일본 시골 여관에 65년째 걸린 사진 한 장...나라가 지켜 주어야 하는데
일본 가고시마(鹿兒島) 여행을 다녀왔다. 한결같이 즐겁고 아름다운 기억들 속에, 인연처럼 만난 사연 하나가 가슴에 애련하다. 지란(知覽)이라고 하는 작은 시골마을의 오래된 여관 복도에 65년 동안 걸려 있는 한국사람 사진 한 장.
이번 여행의 가장 큰 목적은, 도공의 후예인 '심수관(沈壽官)' 도요지와 도자기를 보는 것이 었다. 일정에 시간 여유가 있어 관광안내소에 상담을 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지란이 란 곳을 추천해 주기에, 그 자리에서 관광지도 한쪽 구석 맨 위에 올라 있는 도미야여관 (富屋旅館)이란 곳에 전화로 예약했다.
▼ 심수관(沈壽官)
굽이굽이 산길을 돌아 도착한 지란은 아주 작은 시골마을이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있어, 여관부터 찾았다. 주인 아주머니가 한국인 손님이 길이나 헤매지 않을까 문밖까지 나와 두 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날 손님이라고는 우리 부부 둘밖에 없는, 오래된 조그만 여관이었는데, 현관에서부터 특 공대(特攻隊)와 '호타루(반딧불이)'에 관한 액자와 문구들이 벽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여관은 오래전, 한 한국사람과 깊은 인연이 있는 집이었다.
우리가 한국사람임을 안 주인 도리하마 하쓰요씨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를 들려 주었다.
▼가고시마현
지란에는 태평양전쟁 당시, '가미카제' 자살공격으로 악명 높은 특공대 기지가 있었다. 그때 그의 어머니(도리하나 도메)가 이 집에서 식당(食堂)을 하고 있었는데, 특공대원들이 외출 나오면 이곳에서 식사를 하곤 했다.
그중에는 미쓰야마 후미히로(光山文博·한국명 탁경현)라는 이도 자주 드나들었다. 아들이 없던 그의 어머니는 아무도 면회 오는 이가 없었던 그와 모자(母子)처럼 가까이 지 냈다고 한다.
▼호타루(반딧불이 마을)
그는 출격하기 전날, 작별 인사를 할 겸 찾아왔다. 그는 저녁을 먹으며 "오늘이 마지막이니 내 고향 노래를 부르고 싶다"고 했다. 눈물을 감추려는 듯 모자를 앞으로 당겨 얼굴을 가린 채 그는 '아리랑'을 불렀다고 한다. 한 서린 목소리로….
그가 한국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된 모녀가 그를 위로하자, "만일 제가 죽어 영혼이 있다면 내일 밤에 다시 찾아오겠습니다. 반딧불이 되어…"라는 말을 남기고 떠났다고 했다.
이튿날 그는 출격했고, 태평양에 몸을 던진 그날 밤, 그가 앉아 있던 방에는 거짓말처럼 반딧불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전설 같은 이 이야기는 이후 세상에 알려지면서 여러 해 전에 일본에서 '반딧불이'라는 영화로 제작되기까지 했다고 한다.
▼가고시마 지란의 특공대 박물관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의 어머니는 식당 일을 계속하며, 그와 함께 찍은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혹시라도 그가 살아 돌아오지 않을까, 유족들이라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기다 렸다고 한다.
이제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사람들의 기억에서도 그날의 기억은 잊혀져가고 있는데, 사진만 저렇게 덩그러니 걸려 있는 것을 보면 가슴 아프다고 했다. 유족을 만나든지, 그의 고국으로 사진이라도 전해주고프다며…. 지금은 식당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자기와 딸이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 당시 탁경현님이 탔던 類의 가미가제 비행기
하쓰요씨는 우리의 식사 시중을 들어주며 아린 얘기들을 끊임없이 가슴에 채워주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복도에 걸려 있는 여러 사진들 사이에 빛바랜 낡은 그 사진 한 장이 애처로이 걸려 있었다.
그의 생애에 마지막이 되었을 그 사진이, 이국(異國)의 시골 한구석, 가족은 고사하고 같은 피의 한국사람들조차 발길 하지 않는 이 조그맣고 오래된 여관 벽에 65년이나 걸려 있어야 하다니….
꽃다운 청춘을 피워보지도 못하고 남의 나라 전쟁에 희생이 된 것도 서러운데…. 가슴이 미어졌다.
▼ 출격전 탁경현님
역사의 구렁텅이에서 '가미카제'라는 일제의 총알받이로 나갔던 그를 누구는 친일파라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가 울며 마지막 부른 노래는 아리랑이었다. 그것은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노래였을까.
남의 나라 전쟁에 끌려가 꽃다운 청춘을 묻고, 그 영혼조차 긴 세월을 이국의 구천(九泉)에 서 떠돌아야 했으니…. 암울했던 그 시대에 어찌 억울한 영혼이 그 하나뿐이랴!
울음을 삼키려 고개 숙이고 부른 그의 아리랑이 오늘도 나의 가슴을 울린다. "십리도 못 가서 발병 난다…."
▲ 최길시 前 성남 분당중 교장
지난 8/29 한일병합 100년 國恥日에 올린 글입니다. 팝페라 가수 임형주님의 글을 실어 봅니다. 외국에서 느낀 아리랑...
로스앤젤레스를 대표하는 세계적인 공연장인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서 열린 대한민국 광복 65주년 기념 음악제에 초청되어 LA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반주로 공연을 하였다.
공연일이 8월 15일 광복절이 아닌 8월 14일인 이유는 LA가 대략 우리보다 하루 정도 느리기 때문이란다. 이 사연을 듣게 된 나는 굉장히 흥미로웠는데 아마 이 글을 보는 분도 그러리라 짐작된다.
여하튼 그날 나는 늘 그랬듯이 오페라 아리아와 영화음악, 뮤지컬 노래와 함께 한국가곡을 불렀다. 특히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한국민요 ‘아리랑’을 불렀는데 공연을 보러 온 공연장의 많은 한인 관객이 하나둘 눈시울을 붉히며 다 같이 따라 불러 주었다.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보아왔던지라 덤덤하게 노래를 부르는데 반복하는 구절에서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객석에 있던 한인 가족이 눈에 들어왔는데 나이 지긋 하신 신사가 양복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눈물을 훔치셨다.
그 옆에는 내 나이 정도로 보이는, 딸 같은 여자 분이 있었는데 그녀는 노신사를 가슴 찡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쪽 옆에 있던 부인 같아 보이는 분은 우는 노신사의 어깨를 다정하게 감싸줬다. 노래하며 이 광경을 본 나는 반복되는 후렴 구절부터 울컥하기 시작했다.
노래를 계속하기 힘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추스르고 안정된 목소리로 무사히 노래 를 끝냈다.
한국인 마주치면 나도 모르게 울컥
나는 이제 경력이 오래되어 무대에서 스스로를 컨트롤할 수 있는 베테랑이다, 이런 식의 자랑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다. 12년간을 무대에 선 나도 아직까지 한인 분들 앞에서 한국가곡와 한국민요, 특히 ‘아리랑’을 부르는 일은 힘들다.
해마다 해외에서의 독창회나 협연 공연에서 나는 한국가곡과 한국동요를 불렀다. 예전에 런던 독창회 때는 마지막 앙코르곡으로 애국가도 불렀다. 하지만 ‘아리랑’ 은 부를 때마다 힘들다. 이 노래를 부를 때 한국인처럼 보이는 사람과 눈만 마주 쳐도 이상하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울컥하고 목이 메어 노래 부르기가 힘들다.
나는 남자치고는 감수성이 예민한 편이라 공연에서 슬픈 노래를 부를 때면 눈물을 비칠 때가 간혹 있다. 한 번 그런 일이 있은 이후에는 같은 곡이나 비슷한 노래를 부를 때 끝까지 집중해서 부르기 때문에 또다시 눈물을 보인다거나 음정이 불안 해진다거나 하는 등의 실수를 되풀이하진 않는다.
하지만 ‘아리랑’은 아직까지 예외다. 요즘도 이 노래를 부를 때면 감정을 추스르기 가 쉽지 않다. 아니, 솔직히 고백하자면 쉽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정말 힘들다. ‘왜 아리랑을 부를 때만 유독 그럴까’ 하고 고민할 때마다 떠오른 생각은 늘 하나 였다.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라는 것, 바로 그것이다. 애국가보다 훨씬 이전부터 오랜 세월 한민족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오며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우리와 함께해 온 노래이기에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애틋하게 느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해외 독창회 때 있었던 일이다. 멋진 군복을 입고 가슴에 여러 개의 빛나는 훈장을 단 백인 신사가 독창회가 끝난 후 공연장 밖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부인 과 함께 사인을 요청하며 했던 말과 행동을 잊을 수가 없다.
자신은 6·25전쟁에 참전했던 사람인데 예전에 한국에서 들었던 ‘아리랑’을 오늘 다시 듣게 됐다고 했다. 그때의 아련한 추억에 빠져들었고 자신이 참전했던 나라 가 이제는 당신과 같은 훌륭한 음악가를 배출하는 나라로 발전했다는 사실이 너무 놀랍고 기쁘다면서 내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는 ‘아리랑’ 가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 공연 때 따라 불렀다는 말을 했다. 내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자 그는 미소를 지으며 못 믿겠느냐고 말하면서 약간 어눌하지만 비교적 명확하게 ‘아리랑’을 불러주었다.
그때 느꼈던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지금도 소중히 간직한다. 이것 말고도 내게는 ‘아리랑’과 관련한 감동적인 일화가 꽤 있다.
< 아리랑을 발설하다... >
가슴 깊은 곳, 恨의 울림이란…
‘아리랑’은 노래 자체가 워낙 슬프기도 하지만 가슴 찡한 사연을 많이 안겨준 노래 이기에 더욱 애착이 간다. 올해도 여지없이 나의 ‘아리랑’ 징크스는 치유되지 않았 지만 나는 행복하기만 하다.
왜냐면 아직도 내 가슴속에 열정적이고도 자기감정에 솔직한 한국인의 순수한 피가 끓고 있어서다. 또 한국인 고유의 정서인 ‘한(恨)’을 자연스레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어서다. 언제나 한국인이라는 정체성(Identity)을 일깨워주는 내 나라 내 조국 ‘대한민국’의 광복 65주년을 다시 한 번 진심으로 축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