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꾸고, 뒤집고, 버리고…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업사이드전략' 써라"
지속적인 투자 실패에 갑작스러운 사고가 겹치면서 고객이 다 떨어져 나갔다. 떠나버린 고객을 어떻게 다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사업의 기반이 됐던 관련 산업이 갑자기 붕괴했다. 또 시장에 강력한 경쟁자가 등장하면서 매출은 급감하고 적자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파산 직전의 회사를 어떻게 살려낼 수 있을까?
이 같은 상황은 기업에 언제 어디서 닥칠지 모르는 위기의 사례들이다. 특히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예측하기 힘든 각종 위기 요인에 의해 기업의 존망이 위협받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있다. 조금만 위기 대처가 늦거나 방향을 잘못 잡으면 그야말로 천 길 낭떠러지다.
그러나 이 같은 위기 상황에서도 남이 보지 못한 기회를 포착, 새로운 전략과 고객 서비스, 상품을 앞세워 한 단계 도약하는 기업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위기를 새로운 성장의 기회로 만드는 '업사이드(upside) 전략'을 썼다는 것이다. 단순히 눈앞의 위기 상황을 임시방편으로 넘기는 데 급급한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대처로 극적인 반전을 일궈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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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타벅스 같은 움프쿠아은행
은행을 아예 커피숍처럼 바꿔 고객이 은행에 오래 머물자 금융거래도 늘며 연 29% 성장
■사례 1: '스타벅스 같은 은행'으로 재기한 움프쿠아은행(Umpqua Bank)
미국 오리건주 움프쿠아강(江) 지역의 한 은행 지점.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와 테이블, 대형 벽걸이 TV가 갖춰져 있고, 부드러운 조명과 가벼운 펑크 음악이 흐른다. 인테리어와 분위기는 호텔 로비나 공항 라운지와 비슷하다. 소파에 둘러앉은 10여명의 동네 주민들이 커피를 마시며 한담을 즐긴다.
초콜릿과 음료수는 얼마든지 공짜로 먹을 수 있다.'세계 최고의 고객 서비스'를 자랑하는 움프쿠아은행이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만 해도 파산 일보 직전까지 갔던 '퇴출 1순위 은행'이었다.
움프쿠아은행은 1950년대 오리건주의 벌목회사들을 주고객으로 설립된 소규모 지역 은행이다. 벌목사업이 번창하면서 이 은행은 주변의 작은 은행들을 잇달아 인수, 지역 대표 은행으로 호황을 구가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 이후 벌목사업이 쇠퇴하면서 은행은 존폐 위기를 맞았다. 다른 대형 은행에 인수되는 것이 기정사실로 여겨졌다.
그러나 움프쿠아 경영진은 '은행의 개념'을 변화시키는 과감한 모험을 통해 극적으로 위기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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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공간의 개념을 바꾸다
사람들은 은행에는 아주 잠시 들른다. 그러나 커피숍이나 백화점에 가서는 몇 시간씩 사교와 문화생활을 즐긴다. 그렇다면 은행을 아예 커피숍이나 백화점처럼 바꾼다면?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 움프쿠아는 은행의 콘셉트를 돈을 맡기거나 빌리는 금융기관이 아니라 노드스트롬(미국 대표 백화점)이나 스타벅스 같은 소매 유통점으로 바꾸었다.
고객들이 언제든 편하게 휴식과 만남을 위해 찾을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다. 금융은 거기에 따라가는 부수적인 서비스일 뿐이었다.
②고객의 시간을 뺏다
움프쿠아는 '은행도 커피 전문점이 될 수 있다'는 광고 시리즈를 내보냈다. 커피와 음료수, 과자 등을 공짜로 제공했다. 그래서 고객들이 돈 들이지 않고 책을 보거나 지인들과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 야간에는 은행 지점에서 영화를 상영하고, 음악 공연도 했다.
지역사회의 문화센터로 거듭난 것이다. 이를 통해 움프쿠아는 다른 곳에서 보냈을 고객의 시간을 뺏어 왔다. 고객의 시간을 얻어야 지갑도 얻을 수 있는 법이다.
③커피점 직원을 은행 직원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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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의 콘셉트가 소매점으로 바뀌면 직원 서비스도 달라져야 한다. 먼저 경직적으로 제자리에 앉아있던 은행원들을 고객 테이블로 먼저 다가가는 서비스맨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를 위해 커피 전문점 등 소매점 근무 경험이 있는 직원들을 채용했다.
모든 직원들이 '서비스 학교'에서 연간 40시간 이상 교육을 받도록 하고 이를 인사 평가에 반영했다.고객들의 인식이 바뀌고 은행에 머무는 시간이 늘자 고객의 금융거래가 자연스레 늘었다. 불과 3년 만에 예금액은 2배 이상, 금융상품 판매액은 3배로 늘어났다. 1995년부터 작년까지 움프쿠아은행은 연평균 29%씩 고속 성장했고, 지점 수도 10배 이상으로 늘었다.
작년에는 지역 은행으로는 이례적으로 매출 5억달러를 달성했다.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뱅크오브아메리카(BOA) 등 미국 대표 은행들은 지점 수를 10%나 줄였지만, 움프쿠아는 지점과 직원 수를 오히려 늘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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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장을 끝내고...
드디어 김장을 끝냈다. 김장이 끝나고 나면 정말 걱정이 없다는 뿌듯함이 든다. 예전에 엄마와 할머니가, 겨울에 연탄 들이고 김장하고 나면 세상에 걱정이 없다고 했던 말이 생각난다.
이젠 연탄 때는 때도 아니고 김장도 따뜻한 실내에서 하니 예전처럼 힘들지 않은데도, 여전히 김장은 겨울맞이 대행사로 머릿속에 남아 있다.
연탄 배달과 김장은 모두, 한겨울 난방비와 부식비를 한꺼번에 쓰는 큰 지출이었으니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게다가 연탄 배달을 끝내면 더러워진 한옥 전체를 물청소해야 하니, 낮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기 전에 끝내야 하는 일이다. 김장도 마찬가지였다.
추운 초겨울 날씨에 바깥에서 이삼 일을 고생해야 하는 일인 데다가, 땅이 얼기 전에 김장독을 파묻어야 하니 초겨울에 날을 잘 잡아야 하는 일이었다. 이런 대행사이니 김장을 잘 끝내놓고 나면 배가 절로 부르다는 말이 나오는 게 과장이 아니다.
올해 김장부터 나도 절인 배추를 샀다. 어쩔 수 없는 나이 탓이다. 배추를 뽀개는 일, 절이는 과정에서 배추의 위치를 바꾸어주며 소금물에 고루 적셔지도록 하는 일, 모두 꽤 힘이 드는 일이다. 찬 소금물에 손을 담그고 허리를 굽혔다 펴기를 반복하다 보면 ‘아이고 허리야’ 소리가 절로 나온다.
절인 배추를 사니, 이제 김장은 딱 하루면 끝나는 일이 되었다. 정말 거저먹기다. 헤아려 보니 나 혼자 김장을 한 지도 벌써 올해로 25년째다. 승용차도 없던 때였는데, 겨우내 친정집에 김치통 들고 오가는 일이 너무 귀찮아서 시작한 일이었다. 첫해에는 딱 다섯 포기만 했는데, 의외로 별로 힘들지도 않았고 맛도 괜찮았다.
따뜻한 아파트 실내에서 하는 김장을 마다하고, 엄마가 추운 한옥 마당에서 애써서 담근 김치를 구태여 갖다 먹을 필요가 없었다. 그해부터 이제 나는 엄마의 김치로부터 독립했다. 김장의 매력은 엔간히 해도 맛있다는 점이다. 이런 말을 들은 내 후배는 “공부가 제일 쉬웠어요” 하고 잘난 척하는 것 같다고 면박을 주었지만, 그건 김장을 안 해봤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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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김장은 무엇보다 보통 때 담그는 김치에 비해 훨씬 맛내기가 쉽다. 그러니 겁먹지 말고 시도해 보기를 적극 권하고 싶다. 보통 때의 김치에 비해 김장이 맛있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료가 좋기 때문이다. 늦여름에 심어 가을 내내 성장하는 배추와 무는 날이 점점 추워지면서 겨울을 나기 위한 영양분을 자신의 몸속에 잔뜩 지니게 된다.
그래서 이 계절의 배추와 무가 가장 달착지근하고 맛있는 것이다. 이 맛있는 재료로 한꺼번에 일 년치 김치를 해놓는 것은 매우 현명한 일이다. 배추 맛이 맹탕이 되는 여름에, 그것도 날이 더우면 잘 자라지 않아 고랭지에서 억지로 키워낸 통배추로 김치를 담가 먹는 일은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김장이 맛있는 이유는 또 있다. 보통 때 김치에는 잘 쓰지 않는 해물을 넉넉히 넣기 때문이다.
감칠맛이란 동물성 단백질의 맛이니, 젓갈과 해물을 많이 넣으면 김치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 이북 지방의 시원하고 깔끔한 김치에는, 맑은 맛의 새우젓을 기본으로 하고, 멸치젓이나 황석어젓을 달여 맑은 국물만 낸 액젓을 사용한다. 해물도 생새우와 명태가 중심을 이룬다. 특히 달착지근한 맛은 생새우의 양이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에 비해 호남과 경남의 걸지고 진한 김치 맛을 내려면, 멸치젓이나 갈치젓 같은 걸지고 진한 맛의 젓갈을 탁한 국물과 건더기까지 모두 뒤섞어 넣는다. 어느 해인가 먹다 남은 제주도 자리젓이 있어서 김장에 그걸 털어 넣은 적이 있었는데, 그해 김치 맛은 유난히 화려했다. 해물도 갈치처럼 걸지고 진한 맛의 생선을 넣으면 좋다.
가을에 갈치는 제철을 맞아 아주 맛있는데, 구워먹기에는 지나치게 가늘다 싶은 저렴한 갈치를 잘게 썰어 김치 속에 함께 넣으면 아주 맛있다. 물론 달착지근한 맛을 즐기는 나는, 남도식 김치를 할 때에도 생새우를 넉넉히 넣는다. 그뿐인가. 파·쪽파·갓·생강 등 향을 내는 모든 향신 채소가 모두 제철이다. 그래서 김장은 간만 맞출 줄 알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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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늘 세 가지 김치를 한다. 가장 먼저 두어 포기를 백김치로 담근다. 고춧가루를 전혀 넣지 않고, 무와 배를 채 썰어 파·마늘·생강 등 양념과 버무려 속으로 넣는다. 해물도 넣지 않고, 젓갈은 까나리나 멸치로 만든 맑은 액젓을 쓰면서 소금으로 보충 간을 한다. 젓갈이 전혀 들어가지 않으면 감칠맛이 떨어지지만, 빨간 김치처럼 젓갈로만 간을 하면 백김치의 시원하고 맑은 맛을 낼 수가 없다.
이 백김치는 오래 두면 빨리 무르므로, 소량만 해서 봄이 되기 전에 먹는 것이 좋다.
다음으로는 고춧가루를 적게 넣은 이북식 시원한 김치인데, 개성식으로 키워진 내 입맛에 맞는다. 고춧가루를 적게, 새우젓과 생새우·명태 등을 섞어 슴슴하게 담근다. 버무릴 때에도 양념을 배춧잎의 끝까지 바르지 않고 속 깊이 살짝살짝 넣는다. 고춧가루를 적게 넣었기 때문에, 이 김치는 익으면서 맑은 국물이 시원하게 배어 나온다.
잘 익은 김치의 하얀 줄기는 아삭하여 샐러드가 부럽지 않고, 시원한 국물도 일품이다. 평안도에서는 국물 맛을 내기 위해 쇠고기를 고아 기름을 걷어내고 김장독에 부어 맑고 감칠맛 나는 김치국물을 많이 만든다고 한다. 이것이 한겨울 냉면의 주재료가 되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남쪽 방식의 걸진 김치를 담근다. 부산 출신인 남편 입맛에 맞춘 것이다. 시어머님 하시는 대로, 무를 채 썰지 않고 갈아 넣고 멸치젓과 갈치·생새우를 넣는다. 여기에 고춧가루를 뻑뻑할 정도로 들어부어 진득한 양념을 만들어 배추에 듬뿍 발라 짭짤하게 버무린다. 이 김치는 익어도 빨간 고춧가루 양념과 배추가 함께 어우러져 맛이 아주 화려하고 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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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 때는 내가 보고 자란 대로 내 입맛의 김장을 했는데, 어느 해인가 남편용 김치를 따로 하기 시작했다. 이 김치를 먹으면서는 남편이 “그래 이 맛이야” 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무리 그래도 내 입맛을 포기할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이렇게 가지가지 김치를 하게 되었다. 음식 만들기는 남편을 위한 것만이 아니고, 내가 즐겁게 먹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김장은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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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시절 이야기...구공탄 - 어릴 때 연탄가스로 참 많이 고생했지요. 일주일에 한번은... 동치미 국물이 만병통치약이었던 그 시절의 기억입니다.
‘산림애호’라는 구호와 아궁이용 연탄 화로, 연탄 집게 사용법 등의 그림이 있는 벽보 앞에서 연탄 사용 시범이 진행 중이다. 오른쪽 끝에서 미군이 지켜보고 있다. 연탄 이용의 확산에는 정부의 산림애호 의지도 한몫 단단히 했다.
심하게 말하자면 오늘날 한국의 울창한 산림은 10여만 명의 목숨과 맞바꾼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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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7월 15일의 구공탄 사용 설명회.
우리나라에서 난방용으로 연탄이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이었는데, 처음부터 ‘목탄’(숯) 대용품으로 취급됐다. 연탄은 냄새가 심하고 연기가 많이 났지만, 값은 한참 싸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환영받았다. 1910년대에는 난형탄(卵形炭)이 개발되었고, 1920년대에는 이공탄과 삼공탄이 나왔으며, 1930년대에는 구공탄이 연탄을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구멍이 많을수록 불이 잘 붙고 잘 꺼지지 않았기에 제조 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구멍 수도 늘어 해방 뒤에는 19공탄, 22공탄, 25공탄 등이 속속 출시됐다.1925년 1월 서울 관철동에서 행랑살이 하는 19세 처녀와 15세 사내아이가 연탄가스에 중독되어 죽었다.
날이 너무 추운데도 아궁이에 나무를 땔 수 없어 연탄 두 개를 사서 좁은 방 화로에 피워놓고 자다가 당한 참변이었다. 일제 강점기까지 연탄은 방 안의 화로에 숯 대신 넣고 때는 ‘실내용’ 연료였다. 겨울이 되기 전에 땔나무를 쟁여 놓은 집에서는 굳이 연탄을 사용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연탄가스 중독으로 인한 사망사고는 거의가 도시의 가난한 집에서 일어났다.
인천상륙작전 일주일 뒤인 1950년 9월 22일 서울 탈환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지는 동안 임시수도 부산에서 농림부 장관 윤영선은 기자들을 불러 놓고 대통령 지시사항이라며 겨울철 연료 대책을 발표했다. 요지는 산림녹화를 위해 향후 신탄(薪炭) 채벌을 엄금하며, 그 대신 연탄을 공급할 터이니 집집마다 아궁이를 개량하라는 것이었다.
인명조차 돌보기 어렵던 전시에, 뜬금없이 나무를 보호하자는 얘기가 나온 이유는 알 수 없다. 미군은 낙동강 방어선 전투를 치르면서 한국의 야산에 나무가 없는 데 자주 당혹감과 분노를 표했다. 엄폐물이 없는 탓에 병사들의 공포감은 극에 달했고, 미군 3명 중 1명꼴로 정신과적 문제를 겪었다고 한다. 이런 사정도 이유의 하나가 되었는지 혹시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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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탄 화로를 넣었다 뺐다 하며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도록 아궁이를 ‘개량’하는 사업이 전쟁 중에 시작되어 휴전 후까지 계속됐다. 이후 30여 년간, 해마다 수십만 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됐고, 그중 수천 명씩이 죽었다. 한 세대 전만 해도 연탄가스로 인한 사망자는 하루 열 명꼴이었다. 아궁이만 고치고 구들장은 그대로 둔 것이 화근이었다.
연탄가스 중독 사고의 감소는 구들장이 사라지는 속도에 비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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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내리네... 이선희
요즈음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일들이 많습니다. 삼성의 임원 인사도 어제 있었고...
내년 신묘년 토끼띠 해도 벌써 20일 남짓 남기고 있습니다. 연말까지 경인년 범띠해 마무리 잘 하시길 바랍니다.
자주 인사 못드려 죄송하구요. 앞으론 좀더 자주 인사 드리겠습니다.
이봉식 배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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