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의 달에 드리는 여러가지 이야기

2011. 11. 13. 15:03화석·청천리님 방

가정의 달에 드리는 여러가지 이야기!

 

35년전 이 땅의 애국자들 이야기...

 

   대통령은 가타부타 답이 없었다. 만년필로 보고자료를 탁탁 치기만 했다. 뭔가 마땅치 않다
   는 뜻이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하면 열여덟인데 너무 어리지 않은가. 가족과 떨어져 그
   먼 곳에 가서…."

   1976년 3월, 청와대 서재에서 오원철 경제 2수석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해외진출 기능사
   양성계획'을 보고했다. 공업고등학교 졸업반 학생들을 선발해 기능훈련을 받게 한 후 중동
   건설현장에 파견하는 방안이었다. 박 대통령은 "너무 어리다"며 반대했다.

   군(軍) 제대 예정자들을 대안으로 검토하라고 지시했다. 오 수석은 그럴 수 없는 이유를
   설명했다. "앞으로 중동에서 필요한 인력은 전문 기능인입니다. 기술적인 기초가 있어야
   합니다." 박 대통령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류에 사인했다.

   1970년대 오일 쇼크 앞에서 우리 경제는 훅 불면 날아갈 듯 위태로웠다. 원유 값이 두세 달
   사이에 네 배로 올랐다. 에너지 비용 증대에 따라 공산품, 수입품 가격도 덩달아 뛰었다.
   1974년 경상수지 적자 20억 달러는 당시 정부 예산의 절반 규모였다. 

                                   



   칠흙
같은 어둠, 거센 파도를 헤치며 대한민국호(號)를 이끌던 사람들은 수평선 너머 한 점
   빛을 발견했다. 오일 머니를 블랙 홀처럼 빨아들이던 중동, 그 호랑이 굴 속으로 쳐들어가기
   로 한 것이다.

   그러나 기술 인력이 부족했다. 도로를 닦는 단순 토목공사만 한국 몫으로 돌아올 뿐, 부가
   가치가 높은 플랜트 수출은 미국, 유럽, 일본 차지였다. 중동 진출 업체들은 "기계조립, 판금
   용접, 배관, 전기 등 전문기능 인력을 1500명만 확보해 달라"고 아우성이었다.

   1976년 3월, 정부는 전국 11개 공고를 지목해 3학년 우수학생 2140명을 선발했다. 중동
   현장에 즉시 투입할 수 있는 2급 기능사 인력 1500명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30% 정도
   탈락을 예상하고 640명을 추가로 뽑은 것이다. 이들에게 800시간 실습교육을 시켜야 했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2년이 필요했지만, 6개월로 기간을 단축했다. 중동 건설 붐을 놓치지
   않기 위해선 시간과 싸워야 했다. 정규 이론교육과는 별도로 주당 40시간, 하루 7시간씩
   실습이 진행됐다. 살인적인 스케줄이었다. 이들의 6개월 실습에 쓴 용접용 산소가 8000병,
   아세틸렌가스가 1만 병, 용접봉이 9만㎏이었다.

   6개월 후 국가기술 자격검정 시험이 치러졌다. 70%를 기대했던 합격률이 100%로 나타났
   다. 2140명 전원이 현대, 대림, 대우, 동아 등 건설업체에 취직했다.
1977년 1월, 이들이
   중동 현장에 투입됐다. 당시 용산공고를 갓 졸업한 청년이 사우디 현장에서 보내 왔던 편지
   한 통이 가슴을 아리게 한다. 

                     



  "가족, 모교, 그리고 조국의 명예를 걸머지고 있다는 각오로 일하고 있습니다." 오원철 전
   수석은 저서에서 "임진왜란 때 10대 의병, 한국 전쟁 때 학도병이 있었다면, 70년대 석유
   위기 때는 18세 기능사들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일어났다
"고 썼다.

   마침내 중동 건설시장의 판도가 뒤집히기 시작했다. 한국은 프랑스(7.2%), 영국(5.8%), 일본
   (4.9%) 등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20.9%의 점유율로 미국(36.1%)에 이어 2위에 올라섰다.
   전 세계 대부분 국가들이 제자리 또는 뒷걸음질을 했던 70년대 석유 위기 속에서 대한민국
   만이 10% 내외의 고도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30여년 전, 위기 속에서 기회의 창(窓)을 발견했던 경제팀의 통찰력, 나라 운명을 어린 어깨
   위에 걸머졌던 열여덟 살 산업전사(戰士)들의 장한 결의가 그리워진다.



아버지의 마음... 두번째 이야기


   늙은 아버지의 질문...

      ▼ 까마귀에 쫓기는 붉은 뱃새 매... 강화도님
     

 

 

 

 

 


82세의 노인이 52세 된 아들과

거실에 마주 앉아 있었다.

그 때 우연히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의 나무에 날아와 앉았다.

    ▼ 때까치... 강화도님
   

 


아들은 일기장을 읽었다.

거기엔 자기가

세 살짜리 애기였을 때의 이야기였다.
   



오늘은 까마귀 한마리가 창가에 날아와 앉았다.

어린 아들은

"저게 뭐야?" 하고 물었다.

나는 까마귀라고 대답해주었다.

   



그런데 아들은 연거푸 23번을 똑같이 물었다.

귀여운 아들을 안아주며

끝까지 다정하게 대답해주었다. 까마귀라고

똑같은 대답을 23번을 하면서도 즐거웠다.

   



관심이 있다는 거에 대해 감사했고

아들에게 사랑을 준다는 게 즐거웠다.

 

 

 



노인이 아들에게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정하게 말했다.

"까마귀에요. 아버지"

     ▼ 물까치
   

 

 

 



아버지는 그런데 조금 후 다시 물었다.

"저게 뭐냐?"

아들은 다시, "까마귀라니까요."

노인은 조금 뒤 또 물었다. 세 번째였다.

     ▼ 까치밥
   

 

 

 



"저게 뭐냐?"

아들은 짜증이 났다.

"글쎄 까마귀라고요."

아들의 음성엔 아버지가 느낄 만큼

분명하게 짜증이 섞여있었다.

그런데 조금 뒤 아버지는 다시 물었다.
   

 

 

 



네 번째였다.

"저게 뭐냐?"

아들은 그만 화가 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까마귀, 까마귀라고요.

그 말도 이해가 안돼요?

왜 자꾸만 같은 질문을 반복하세요?"

조금 뒤였다.

   

 

 

 



아버지는 방에 들어가

때가 묻고 찢어진 일기장을 들고 나왔다.

그 일기장을 펴서

아들에게 주며 읽어보라고 말했다.


설탕에 대하여...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약재나 향신료·방부제의 원료로 쓰였다. 11세기 아랍에서는 만병통치
   약으로 불리기도 했다. 천연당분인 설탕은 3대 영양소인 탄수화물의 원천이다. 성장과 뇌
   활동에 필수 에너지원이기도 하다. 먹으면 금세 혈당으로 전환돼 몸에 에너지를 공급한다.

   기력이 없는 사람이 포도당 주사를 맞는 이유다. 등산이나 마라톤을 하다 지치면 사탕이나
   초콜릿을 먹는 것도 같은 이치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백해무익(百害無益)이란 말을 달고
   산다. 위상이 이처럼 추락한 식품도 드물다. 문제는 과잉 섭취다. 사람은 필요로 하는 당
   에너지를 쌀·잡곡 등을 통해 얻을 수 있다. 

               



   곡류를 통한 당분은 긴 소화과정을 거치면서 연소돼 몸에 별 부담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설탕은 빠른 흡수력으로 인해 자칫하면 과잉 축적된다. 체중 증가와 성인병의 원인이 되는
   것이다. 당분은 혈액 내 칼슘의 배설을 촉진해 뼈를 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정상상태에서
   약알칼리성을 유지하는 우리 몸은 당분을 많이 섭취해 산성으로 기울면 면역력이 떨어진다.

 사탕수수(sugarcane)와 사탕무(sugar beet)에서 추출하는 설탕은 온갖 식품에 들어간다.
   과자·빵·스낵·청량음료·케첩·아이스크림·껌·라면 등 헤아리기도 힘들다. 과잉 섭취를 피하기
   어려운 이유다. 첫 기록은 기원전 327년에 나타난다. 알렉산더 대왕 휘하의 한 장군이 인도
   를 항해한 뒤 “이곳 사람들은 벌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갈대의 줄기에서 꿀을 만들고 있다”
   고 썼다. 

        



   십자군 전쟁 때 유럽으로 전파됐다. 1492년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뒤엔 중남미 지역
   에 사탕수수 재배를 위한 대규모 농장(플랜테이션)이 마구 생겨났다. 노동력은 아프리카에서
   데려온 노예들이었다. 면직물과 함께 설탕은 노예무역을 낳은 장본인이기도 하다.

 이 땅에선 1920년 일본이 평양에 세운 ‘대일본제당’이 처음이다. 우리 기업으론 해방 후인
   1953년 제일제당이 부산에 지은 공장이 효시다. 70년대만 해도 설탕은 명절 선물 목록의
   상단을 차지했다. 손님이 오면 설탕물을 대접하기도 했다. 참 옛날 얘기다.

 

   하지만 물가를 관리하는 관리들의 생각은 이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물가 문제만
   나오면 설탕을 흘겨보곤 한다. 소비자물가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03%에 불과한데도 말이
   다. 설탕 가격을 틀어쥔 결과 국내 가격이 주요국에 비해 30% 이상 싸다고 한다. 혹시 과잉
   섭취를 유도한다는 비난이 나오지 않을까.


 팁)
   

항생제를 복용할 때 설탕 한 스푼
을 같이 먹으면 만성 재발성 질병
의 원인균을 완전히 퇴치할 수 있
다는 연구결과가 네이처 최신호에
실렸다.

만성이고 재발이 잦은 질병은 원
인 균(박테리아)이 대사 활동을
중지하고 휴면에 들어간 것이 원
인인 경우가 많다. 이때는 항생제
가 효과를 내지 못한다.
휴면 박테리아는 몇 주일이나 몇
달이 지난 뒤 더욱 강하고 공격적
인 모습으로 깨어나 병을 재발시키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 같은 저항성 박테리아는 병을 몇 개월 이상 지속되게 만들면서 감염이 신장이나 다른 장
   기로 퍼지게 하는 원인으로 꼽힌다. 이는 돌연변이를 통해 항생제에 내성을 지니는 것과는
   구분되는 현상이지만 거의 마찬가지 피해를 끼친다.

   그런데 설탕속의 포도당과 과당은 휴면 중인 세균을 자극해 깨어나게 만든다. 그러면 항생제
   로 제거할 수 있게 된다.

   이 같은 전략을 바탕으로 미국 보스톤대학교 제임스 콜린스 박사는  요로감염의 대표적 원
   인균인 대장균(E. coli)을 대상으로 항생제와 함께 설탕 한 스푼을 넣었다. 그 결과 2시간 만
   에 이 균이 99.9% 제거되는 완벽에 가까운 효과가 나타났다. 반면 설탕 없이 항생제만 투여
   했을 때는 아무 효과가 없었다. 이미 박테리아가 휴면 중이었기 때문이다.

   이 같은 효과는  다양한 감염성 질병의 원인인 저항성 황색포도상 구균을 대상으로 한 실험
   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났다. 연구진은 결핵균을 대상으로 동일한 실험을 준비 중이다.

   콜린스 박사는 “이 효과가 결핵에도 똑같이 적용된다면 세계에서 매일 4700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이 병을 물리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될 것”이라면서 “ 우리의 목표는 새 항생제를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 항생제의 효능을 개선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추신수입니다.

 

이 공간에 들어오기까지 많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지금 제 상황에선 어떤 변명도, 설명도 할 수 없는 입장이라 일기를 통해 그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었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고, 피하고 싶은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만큼은 그 동안 입을 닫고 있었던 그 문제에 대해 정중히 사과 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30년을 살면서, 이번처럼 많은 욕과 질타와 비난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제가 저지른 엄청난 실수에 대한 후유증이 채 가시기도 전에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의 화살들이 쏟아지다 보니 한동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어요.

 

지금까지 절 응원하고 격려해주셨던 많은 분들께 씻을 수 없는 충격과 실망과 아픔을 안겨드렸습니다. 새벽 잠을 줄이고 메이저리그 중계를 보면서 저와 함께 희로애락을 나눴던 팬들을 저버렸습니다. 제가 안타와 홈런을 쳤을 때 환호를 보내고 삼진으로 물러날 땐 ‘괜찮다’며 따뜻한 응원을 보내주신 분들께 배신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물의를 일으킨 직후 오클랜드와의 원정 경기에 합류했던 건 다 아실 거예요. 당시 매니 악타 감독이 절 불러서 이렇게 물어보시더라고요.

 

“추, 게임을 뛸 수 있니? 힘들면 잠시 쉬어도 된다. 난 네 의견을 존중하겠다”라고요.

 

왜 저라고 쉬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까요.

잠시 야구장을 벗어나 제 행동을 곱씹으면서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확인하고 싶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야구장 밖에서 벌어진 일로 인해 야구에 지장을 받는 건 옳지 않다는 생각에 출전을 강행했습니다. 

 

오클랜드 3연전 동안 전 정말 마음 속으로 울었습니다. 3연전 내내 야구장을 찾은 미국인들의 심한 야유와 비난을 직접 듣고 겪으면서 외야에 서 있는 제 자신이 한없이 비참하고 초라해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때 외야에 있는 관중석에서 ‘추신수 파이팅’이란 응원카드를 들고 “신수 형, 힘내세요! 우리들은 형을 영원히 지지합니다!”라고 외치는 한국 유학생들의 목소리가 제 심장을 파고들었습니다. 관중들의 야유가 거세질수록 그들의 응원 소리 또한 더욱 커져만 갔습니다.

 

경기 중이었지만, 경기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었는데도, 전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치고 올라오는 뜨거운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너무나 형편없는 사람을, 실수투성이인 존재를 보기 위해 멀리서 야구장을 찾은 팬들이 감사했고, 야유와 비난을 퍼부어도 모자랄 판에, 저에게 힘이 돼주려고 애쓰는 그들의 배려가 진심으로 고마웠습니다.

 

그 동안 전 쉼 없이 달려왔습니다.

미국 진출 후 10년이 넘는 동안 한국 팬들의 지지와 격려 덕분에 가슴에 큰 별을 달고, 든든한 마음으로 생활했습니다.

 

많은 분들이 지적하시는 것처럼 지난 해 아시안게임을 통해 병역 면제 혜택을 받고, 올시즌 거액의 연봉 계약을 맺어 잠시 제 위치를, 제 현실을 잊고 물의를 빚었다는 말씀 또한 가슴 깊이 받아들입니다.

 

저도 인간이고, 실수를 할 수 있다는 변명 또한 하고 싶지 않습니다. 제 가슴에 큰 별을 달아준 팬들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배신감을 안겨준 부분은 어떤 말이나 위로로도 해결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기 때문입니다.

 

저로 인해 제 가족들 또한 심한 아픔을 겪어야 했습니다. 저를 향한 비난이 가족들한테까지 쏟아지면서 아들 잘못 둔 죄로, 남편 잘못 만난 죄로, 가족들 또한 숨죽이며 가슴 아파했습니다. 임신 중인 아내가 인터넷에 올라온 엄청난 질타와 비난의 글들을 읽고 쓰러졌을 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습니다.

 

그러나 전 절대로 야구를 놓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겪고 있는 아픔들이 헛된 아픔이 아닌 가치 있는 경험으로 승화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때리시면 맞겠습니다. 어떤 비난도 감수하겠습니다. 그 모든 부분을 안고 받아들이면서 제 야구를 할 겁니다. 저를 응원하는 단 한 명의 팬이라도 있다면 그를 위해 더 열심히 야구를 하겠습니다.

 

제 인생에 이런 브레이크가 걸린다는 걸 상상조차 못했는데, 이미 엎질러진 물, 주워 담을 수 없기에 겸허히 받아들이려 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아내 건강 지키기


   14일은 가정의 날, 지난 5일은 어린이날, 21일은 부부의 날이다. 부부 역할이 평등해지고는
   있지만 아직까진 가정의 중심은 아내다. 아이를 돌보고 남편을 챙겨 주고 부모님을 모신다.
   남편이 쓰러지면 그래도 ‘집안 꼴’이 유지되지만 아내가 쓰러지면 집안 꼴이 말이 아니게
   된다.

   정작 아내는 자신의 건강에 대해 별 관심이 없다. 아이와 남편을 위해서는 같은 음식이라도
  ‘엑기스’만 뽑아 먹이지만 자신은 ‘남은 음식 처리반’이 되기 일쑤다. 남편은 큰돈 들여 정기
   종합검진을 받게 하면서도 자신은 내시경 검사 하나에도 망설인다.

   이런 아내들의 최대 고비는 중년기다. 최근 여자, 40세부터 건강하게(P당 출판사) 를 공동 집
   필해 출간한 이대목동병원 산부인과 주웅교수로부터 남편이 꼭 알아야 할 40~50대 여성의
   건강에 대해 들어봤다.

                              



-40세 이후부터 아내와 남편의 성격이 반대가 되는 것 같다. 호르몬 때문인가.

  “그렇다. 40세부터 여성호르몬 분비가 점점 줄어 50세 전후 폐경이 되면서 난소에서 여성호
   르몬 공급이 뚝 끊긴다. 여성의 몸은 원래 여성호르몬과 남성호르몬의 비율이 98대 2 정도
   다. 난소의 여성호르몬 공급이 끊기면 부신피질에서 나오는 소량의 여성호르몬밖에 없는데,
   그러면 남성호르몬과 여성호르몬의 비율이 비슷해진다.

   그래서 원래 있던 여성성이 줄고 남성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폐경 이후 여성들이 성격이 괄
   괄해지고 두려움도 없어지는 것은 실은 신체적 변화가 원인이다.


   남편은 반대다. 대다수를 차지하던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40~50대부터 준다. 반면 늘어난
   뱃살의 지방조직에서는 여성호르몬이 분비되기 시작한다. 결국 남성도 남성호르몬의 비율은
   줄고 여성호르몬 비율은 높아져 여성성이 커진다. 생전 피도 눈물도 없던 남편이 드라마를
   보며 눈물 흘리는 모습을 자주 보인다면 남성호르몬 분비가 저하됐다고 봐도 좋다.”

                        



-남편이 모르는 아내의 갱년기 증상은.

  “성욕감퇴를 들 수 있다. 여성호르몬이 나오지 않으면 생식기 작동과 관련된 물질 분비도 준
   다. 특히 질 분비물이 잘 나오지 않아 부부관계 시 통증을 느낄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
   레 부부관계를 피하게 된다. 크림·젤 등 질 건조증을 완화하는 다양한 제품들이 있으므로 의
   사와 상담 후 활용케 하는 게 좋다. 여성은 남편의 치료 권유만으로도 큰 위안을 얻는다.

   우울증도 심해진다. 자신도 모르게 짜증을 내고 바가지를 긁는다. 여성호르몬이 줄면서 몸
   속 호르몬 밸런스가 깨져 세로토닌 등 기분 조절에 필요한 호르몬 분비도 준다. 갑자기 아내
   가 달라졌다고 서운해하기보다는 몸속에서 생기는 현상 때문이라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

   소변이 자주 마렵고 아랫배가 뜨끔뜨끔 하는 증상도 많이 나타난다. 또 덥지도 않은데 얼굴
   이 붉어지고 땀을 흘리는 증상도 겪는다. ‘혼자 보약을 먹었다’느니 ‘성질이 급하다’느니 하면
   서 면박을 주지 말아야 한다.”

-40대 이후부터 주의해야 할 여성질환은.

  “최근 여성에게도 암이 급격히 증가하고 있다. 갑상샘암·유방암·위암·대장암·폐암 순으로 암
   이 빈번하게 나타난다. 40대 이후라면 1년에 한 번씩 갑상샘 초음파, 유방 초음파와 맘모톰
   (유방 X선 검사), 위와 대장 내시경, 흉부 X선 검사를 받아 이들 장기에 암이 없는지 살펴본
   다.

   부인과 검사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남편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검사를 소홀히 할 때가
   많다. 부인과 3대 암인 자궁경부암·난소암·내막암 검사를 받는다. 자궁경부암은 질 내부에
   직접 기구를 넣어 세포를 채취해야 하지만 난소암과 내막암은 초음파 검사만으로도 간단히
   알아볼 수 있다.”

               



-자궁경부암에 대한 오해가 많다.

  “대부분의 자궁경부암은 성관계 시 인유두종 바이러스가 옮겨져 발생한다. 하지만 100%
   성관계에 의해서 옮는 것은 아니다. 최근 여러 연구 결과 악수와 같은 단순한 피부 접촉,
   속옷에 의한 감염도 다수 보고됐다. 서로를 믿고 치료에 매진하는 것이 중요하다. 암을 초기
   에 발견한 경우 적은 부위를 제거하고도 완치가 가능하다.”

-여성암과 갱년기 질환으로부터 아내를 지키려면.

  “콩 섭취를 적극 추천한다. 콩은 여성 호르몬의 보고(寶庫)다. 식물성 에스트로겐(여성호르몬)
   인 이소플라본이 풍부하다. 체내 여성호르몬의 양이 줄었을 때 인위적으로 식물성 에스트로
   겐을 보충하면 갱년기 증상을 완화하고 유방암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어쩌다 한 번 먹
   는 것은 별 효과가 없다. 매일 일정량 이상을 섭취해야 효과가 있다.


   함께 운동을 하는 습관도 들이자. 자전거 타기나 등산도 좋지만 운동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빨리 걷기 운동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걷기 운동은 세로토닌을 분비해 기분을
   좋게 하면서 이야기의 물꼬를 터 준다. 또 관절을 위해서라도 40대 이후에는 과격한 운동은
   하지 않는 게 좋다.”

                  



-수천 명의 여성과 상담했을 것이다. 여성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사랑받으려면.

  “아직도 어려운 질문이긴 하지만 부인과 진료실에서 여성 환자만을 진료한 노하우를 바탕
   으로 대답하겠다. 진료도 환자가 원하는 맞춤형이 대세이듯이 여성에게 사랑받는 법도 여성
   이 어떤 것을 원하는지 파악하는 데서 시작한다. 부인이 좋아하는 연속극이나 영화를 같이
   보며 대화를 나눈다.

   드라마 속 어떤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 드라마 속 인물의 어떤 점이 좋은지 서로
   얘기하다 보면 아내가 원하는 감정을 읽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한 여자의 남편으로서, 여성질환 전문의로서 터득한 확실한 것 세 가지라면
  ‘다른 여성 칭찬 안 하기’ ‘미용실 다녀온 날 알아차리기’ ‘생일과 결혼 기념일 잊지 않기’
   꼽을 수 있다.”


젊은 세종의 무기는 '열린 귀'였다


   젊은 군주 세종이 풀어야 할 최우선 과제는 노(老)대신들의 마음을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부왕인 태종이 상왕으로서 군사권과 인사권을 쥐고 흔드는 상태에서 2인자의 길을 걷는 것
   도 어려웠고, 고려에 대한 단심(丹心) 운운하는 길재와 같은 신하들의 존재도 부담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려운 과제는 세종보다 2~30년씩 나이가 많은 노회한 대신들의 적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는 일이었다. 고려 말부터 혁명과 건국 등 시대의 격변을 겪어낸 그들이
   보기에 세종은 태종 이방원과 달리 그저 책만 열심히 들여다보던 애송이에 불과했을 수
   있다.
                    ▼ 허조의 정충각
                    



   즉위 초년 박은·허조 등이 세종에 대해 보였던 데면데면한 태도는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실제로 세종이 왕위에 오른 1418년을 기준으로 황희는 왕보다 34세가 많은 56세였고,
   맹사성은 황희보다 세 살이나 더 많은 59세였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들어가는 윤회가 39세로
   세종보다 열일곱 살이나 연상이었다.

   그야말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고, 실세인 상왕 곁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노대신들의 마음을
   청년 세종은 어떻게 사로잡았을까?

   세종이 그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취한 첫 번째 조치는 부지런히 묻고 경청하는 일이었다.
   즉위한 지 사흘째 되던 날 "내가 인물을 잘 모르니 경들과 의논해서 벼슬을 제수하려 한
   다"는 왕의 말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즉위 제일성이 "의논하자"였던 것인데, 세종은 대신들을 수시로 불러서 나라에 도움되는
   절실한 말을 강직하게 말해달라고 주문하곤 했다. 토론하다가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오면
   곧 해당 부처에 명을 내려 시행하도록 하는 조처도 신하들의 신뢰를 쌓는 데 도움이 됐다.

 
 

   세종의 탁월한 지적 리더십 역시 신하들의 존경심을 이끌어 내는 데 기여했다. 세종은 경연
   이라는 세미나식 국정회의를 매달 5회꼴로 열었는데, 신하들은 국왕의 해박한 유교 경전 및
   역사 지식에 감탄하곤 했다.

   특히 그는 회의 때 신하들의 무지가 드러나면 "무릇 배우는 자들이 스스로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옳다. 그대들은 그 알지 못하는 것을 혐의쩍게 여기지 말라"고 다독거리곤 했다. 학문에
   있어서 뛰어날 뿐만 아니라 겸손한 세종의 인격에 신하들은 차차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흥미로운 것은 세종이 신하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뛰어났다는 점이다. 1425년 정월의 종
   묘 제사 때 허조가 겪은 에피소드가 그 한 예다. 당시 허조는 행사를 주관하는 이조판서였는
   데, 술잔을 들고 물러나오다가 그만 실족해서 계단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다들 경악을 금치
   못하는 상황에서 세종이 급히 다가가 한 말은 "허 판서 다치지 않았나"였다.

   허조가 황망한 가운데 다시 계단 위에 올라와 사죄를 하자 세종은 “계단을 넓혀서 앞으로
   이런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하라”
고 말했다. 마땅히 벌을 주어야 하는 상황에서 세종은 오히
   려 그의 몸이 상하지 않았는지를 묻고, 이어서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계단을 넓히라고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세종보다 28세나 연상으로 줄곧 ‘태종의 사람’을 자처하던 허조가 세종의 충성스러운 신하
   로 바뀌게 된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중요하게 작용했다.

   노대신들의 마음을 감동시켰던 가장 중요한 비결은 뭐니뭐니해도 역시 세종의 강점경영에
   있었다. 그는 신하들의 장·단점을 기억해 두었다가 그들을 임명할 때 그 자리에 왜 그가 적임
   자인가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1428년에 황희가 뇌물 받은 혐의로 탄핵을 받았을 때가
   좋은 예다.

   세종은 정승이란 자리는 나랏일의 대체(大體)를 알고 많은 인재를 추천해야 하는 관직인데,
  “경은 나랏일에 의심나는 것이 있을 때 귀신같이 그 해법을 제시하는 능력이 있고, 인사나
   형벌을 의논할 때는 실로 저울대와 같다”면서 황희의 사직상소를 되돌려주었다. 그가 맡은
   관직의 핵심 조건과 함께 그의 장점을 함께 이야기해 주어서 자긍심과 사명감을 갖게 한 것
   이다.
                          ▼ 파주의 황희선생 영당
                          



   허조와 김종서를 중용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세종은 관직에서 물러나려는 허조에게 “경은
   강직하고 정직한 자질을 타고났다”면서 지금 사직하면 장차 “임금의 실수를 바로잡고 나라
   풍속을 진작시키는 일은 누가 맡을 것이냐”며 허락하지 않았다. 어전회의에서 일이 잘못될
   가능성을 집요하게 지적해서 바로 잡는 그의 역할을 높이 산 것이다.

   그뿐 아니다. 김종서를 북방의 영토경영 책임자로 맡기면서 “경은 옛일을 상고하는 힘과 일
   을 잘 처리하는 능력이 있다”고 말했다. 중국 및 여진족과 빈번이 영토문제로 갈등을 겪어야
   하는 함경도의 국방 책임자로서 과거의 사례를 잘 알고 있다는 점, 그리고 일을 결단하는
   능력을 가진 김종서의 강점을 높이 산 것이다.

   이처럼 세종은 중요 관직에 사람을 임명할 때는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이며, 왜 그가 필요한가
   를 구체적으로 말하곤 했다. 세종 시대의 많은 신하가 때로 과로사의 지경에 이르면서까지
   맡은 일을 완수한 것은 그 같은 존재 인정과 두터운 신뢰 때문이었다.

   허조가 임종 때 “지금까지 나는 국가의 일을 나 자신의 책임으로 여기며 살아왔다”며 “나와
   같은 죽음은 아마 내 이전이나 이후에도 찾기 힘들 것”이라고 행복한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세종의 강점경영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임명의 명령’만 있고 ‘임명의 말씀’이 없이 고위
   직 관료들을 자리에 앉히고 경질하는 요즘의 인사 관행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생각해보면 학창 시절 가장 기억에 남는 선생님은 바로 나의 가능성을 찾고 인정해준 분들
   이었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나의 장점을 발견하고 격려해준 그분들이 있었기에 오늘날의 우리
   들이 있게 된 것이다.
신하들의 강점을 인정하고 살려준 세종의 멘토 리더십이 그의 탄생일
   을 기려서 정한 5월 15일 ‘스승의 날’이 되면 더욱 그리워진다.


동무생각... 청라언덕과!

 


           봄의 교향악이 울려퍼지는 청라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
           나는 흰나리꽃 향내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청라언덕과 같은 내맘에 백합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피어날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더운 백사장에 밀려들 오는 저녁 조수위에 흰새 뛸적에
           나는 멀리 산천 바라보면서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저녁조수와 같은 내맘에 흰새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떠돌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소리없이 오는 눈발사이로 밤의 장안에서 가등 빛날때
           나는 높이 성궁 쳐다보면서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
           밤의 장안과 같은 내맘에 가등같은 내 동무야
           네가 내게서 빛날때에는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Sop. 조수미  

  



   



  

  우리가 즐겨 부르고 듣는 이 노래는   

   대구 출신 작곡가 박태준 선생(1901~1986년)이 마산 창신학교 교사 시절(1921~23년) 
   노산 이은상
선생과 교분을 쌓게 되었으며, 박태준 선생이 1911~1916년까지 계성학교에
   다녔던 자신의 집(현 섬유회관 인근) 앞을 지나던 한 여고생을 잊지 못했던 
짝사랑이 
   작곡의 동기가 되었던 노래라고 알려졌다.

   동산은 그가 현재의 제일교회 옆 3·1운동 계단을 지나 등교하던 길이었다.
   그 여학생은 한 송이 흰 백합 같은 절세의 미인이었지만 박태준 선생은 내성적인 성격 탓
   에 말 한마디 붙여보지 못했으며, 그녀는 졸업 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은상 선생이 이 사연을 듣고 ‘노랫말을 써 줄 테니 곡을 붙여보라’고 박태준 선생에게
   권유함으로 탄생한 것이 ‘동무생각’이다. 

                                                                         봄을 즐기는 학도요... 
강화도님



 
'동무생각'에 등장하는 ‘청라언덕’은 푸를 청(靑), 담쟁이 라(蘿)를 쓰고 있는데, 이 ‘청라’가
   지금도 푸른 담쟁이로 뒤덮은 동산병원 내 선교사 사택 일대의 언덕을 말한다고 한다.

  ‘동무생각’이 청년 박태준의 로맨스를 담고 있다는 건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그 여고생이 당시의 신명여자학교(현 신명고) 학생이냐, 대구공립여자보통학교
  (현 경북여고) 학생이냐 하는 논란도 한동안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하였으나 
 
공교롭게도 경북여고 교화가 백합이었고, 경북여고 개교는 1926년인데 비해  신명여고
  개교는 1907년으로  ‘동무생각’ 작곡 시기(1922년)보다 빠르기 때문에 신명여자학교가
  맞다는 것이다. 

   


 

  또한 당시 박태준 선생의 집과 신명여자학교의 등굣길은 일치한다는 점도 이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또 ‘동무생각’ 3절에 나오는 가사 
 ‘서리바람 부는 낙엽동산 속 꽃 진 연당에서…’의 연못은 동산에 물을 대주던 ‘선황당 못’
  이라는 것도 이번에 밝혀졌다. 이 연못은 1923년 서문시장 확장과 함께 메워졌다. 


  

 

 

 

최영애 음악칼럼니스트

 

우수가 지나고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며 온갖 동물들이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도 지났다. 그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아직은 매서운 북서풍의 칼바람이 얼굴에 와 닿는다.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는 내게 지난 겨울은 길고 긴 인내의 터널을 통과하는 기분마저 들게 했다.
 

눈이라도 내린 다음날은 온종일 거북이 걸음으로 운전을 하며 바쁜 일정에 쫓겨 다니던 기억뿐이다.

 

'이젠 봄이 오겠지, 조금씩 천천히라도 ...' 간절히 기다리는 맘은 아마 나뿐이 아닐 것 같다.
 

봄은 우리 곁에 어떻게 다가오는 걸까. 형형색색 하루가 다르게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 거리의 가로수와 꽃들의 모습으로, 아니면 뺨을 스치는 바람의 따스함과 햇살, 그리고 향기로운 봄내음으로 봄이 왔음을 느끼는 걸까.
 

아니다. 봄은 밝고 희망찬, 아름답고 경쾌한 음악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려준다.

 

지난주 내내 라디오를 통해 비발디 바이올린 협주곡 '사계' 중에서 op. 8-1 '봄', 멘델스존의 무언가 op. 62-2 '봄노래'를, 그리고 차이콥스키의 '사계' 중에서 op. 37-3 '3월-종달새'를 여러 번 반복해서 들었다.

 

모두가 이젠 봄을 기다리는 마음에서 봄을 마중하는 마음으로 바뀌고 있음을 확인하는 기분이었다.
 

'봄의 교향악이 울려 퍼지면 청라 언덕 위에 백합 필적에/나는 흰 나리 꽃 향기 맡으며 너를 위해 노래, 노래 부른다/청라 언덕과 같은 내 맘에 백합 같은 내 동무야/네가 내게서 피어날 적에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봄이 되면 누구나 노래 한 곡쯤 부르고 싶은 마음이, 아니면 자신만의 봄노래를 듣고 싶을 마음이 든다. 겨우내 움츠리고 억눌려 있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봄의 생기를, 희망을 즐기고 싶은 것이다.
 

이런 우리 모두의 마음을 노래한 가곡 '동무생각-사우(思友)' 속의 청라 언덕이 바로 대구에 있다.

 

1922년 노산 이은상이 시를 쓰고 한국 서양음악 작곡가 제1세대의 대표적인 가곡 작곡가이자 우리나라 교회음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긴 박태준이 곡을 붙인 '동무생각'은 한국 최초의 가곡이라고 할 수 있다.

 

대구가 고향이었던 박태준 선생이 평양 숭실학교를 마치고 마산 창신학교에서 교편 생활을 하던 중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담은 노래기도 하다.
 

현재 동산의료원 사택지 안에 있는 대구 최초의 서양식 건물인 선교사 사택이 담쟁이 덩굴로 뒤덮여 있는데 푸른 담쟁이를 '청라(靑蘿)'라고 쓴다.

 

대구 계성학교를 마친 박태준 선생이 노산과 마산 창신학교에서 만나 교류를 하다가 학창시절의 추억을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노래로 표현한 것이다.
 

지금은 박태준 선생의 '동무생각'을 기념하는 '청라언덕' 비가 세워져 있는 동산 의료원 사택지 안에는 이외에도 여러 대구의 역사가 함께 자리하고 있다.

 

제일교회 앞 오르막 길에는 일제강점기 대구의 독립운동을 기념하는 '3·1운동길'이라는 운치 있는 90개의 계단길이 있으며 사택지 안에는 1900년대 초반 대구에 도착한 선교사들의 의료 및 선교 활동을 기리는 여러 기념관들도 마련되어 있어 좋은 역사교육도 함께 할 수 있다.

 

대구하면 사과를 떠올리는데 대구 사과가 1900년대 선교사들이 처음 가져와 심기 시작한 것이라는 기록도 확인할 수 있다.
 

'동무생각'은 수많은 아름다운 한국가곡 중에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음악교과서에 단 한 번도 누락된 적 없이 계속 실린 유일한 가곡이라고 한다.

 

따뜻한 봄이 오면 청라 언덕에 올라 잊었던 옛동무를 떠올려보는 건 어떨까.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21일은 부부의 날! 서로 서로 배려하는 기쁨을!

 

 

 
  • 화석 화석
    • 화석
    • 2011년 5월 17일 오전 5:29
    뉴스 올리다 다 날아갔습니다. ㅎㅎㅎ
    좋은 하루 되시길 ...고란초님!
    • 고란초 고란초
      화석님, 방문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좋은 소식, 좋은 글 많이 주셨네요.ㅎ
      까마귀 이야긴 아버지와 아들간의 사랑과 관심을 잘 보여준 글이네요.
      청라언덕과 백합과의 관계도 애잔하구요.
      화석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한 날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