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blog/1822C5475097965E39)
#1.북괴의 6.25 도발이 일어나고 인천 상륙작전, 그리고 1.4후퇴 이후 휴전선 근처 중공군과 일진일퇴를 거듭하고 있던 1951년 5월 14일 동부전선에 겨우 중공군 1개 중대의 오미재고개 진격으로 한국군 3군단이 중공군에게 완전히 포위된 것으로 오인, 후퇴도 철수도 패전도 아닌 '패주'의 치욕을 맛보게 된다.
창단 8개월만에 군단이 해체되고 작전권을 박탈되는 수모를 당하고 예속되었던 각 사단은 미군에게 소속되는 한국군 사상 굴욕의 사태를 맞이 하였다. 물론 연습못한 사병들이었지만 그들은 용감했었다. 하지만 제대로 교육받은 장교, 장군이 별로 없엇던 탓이다.
하기사 선장 출신으로 상선회사 고문인 신성모가 국방장관이고 야전경험이 전무한 병기학교 출신인 채병덕이 육해공군 참모총장으로 6.25를 맞이하고 그리 큰소리만 일관하다 3일만에 서울이 함락된 실정이니... ▼ 오미재 고개 전투상황
![](https://t1.daumcdn.net/cfile/blog/1218D14B5097966D24)
#2.이를 계기로 당시 리즈웨이 8군 사령관의 뒤를 이어 당시 소장이었던 밴 플리트 신임 8군 사령관을 임명하게 된다. 그는 1951년부터 1953년까지 가장 어려울 때에 8군사령관직을 수행했다. 미 2군사령관이던 그는 1951년 4월 11일 사령관을 맡아 가장 오랫동안 한국전쟁을 지휘했고, 이후 군 경력을 마감했다.
그는 1차대전 때는 퍼싱(Pershing) 장군휘하에 있었고, 2차대전 때는 8연대장으로 1944년 6월 유타 비치 상륙에 이바지했고, 패튼(Patton)의 3군에서 근무했다.
일단 밴 플리트 장군은 위대한 군인이었다. 2차대전 때 용맹을 날렸지만 비슷한 이름을 가진 장교로 마샬(Marshall) 참모총장이 오해해 진급을 못하다가 마샬 장군이 오해임을 인정하고, 곧 사단장, 군단장으로 진급하게 되었다.
2차대전 후에는 미군 지원단으로 그리스의 게릴라를 소탕해 공산화를 막았다. 또 그는 한국전쟁 중 공군 대위인 아들을 잃기도 했고, 백선엽 사령관을 시켜 지리산 공비를 소탕했다.
![](https://t1.daumcdn.net/cfile/blog/112D8C4A5097967F1F)
밴 플리트 장군은 부임한 지 얼마 안 되어 보병 6사단(사단장 장도영)이 춘천을 점령, 사단사령부가 춘천 소양강변에 잠깐 머무르면서 화천과 9만리 발전소를 향해 진격을 준비하고 있을 때 리지웨이(Ridgeway) 극동군사령관과 함께 독려 차 사단사령부에 왔었다. 당시 춘천시내 가옥들은 빈집이었다.
곧이어 이승만 대통령도 왔다. 밴 플리트 장군은 포탄공격을 무진장 퍼붓게 했고 한국군 보병대령들을 3개월간 포병 훈련을 시켜 준장으로 진급시켰는데 그것이 포병 증강에 기여했다. 박정희 장군도 그중의 하나다.
1951년 6월에는 일본에 있는 16군단을 포함해서 4개 군단으로 원산 밑에 상륙함과 동시에 금강산을 협공, 39도선까지 진격하는 작전명령을 일괄적으로 내렸으나, 리지웨이 극동군사령관의 동의를 못 얻어 시행되지 못했다. 진격 준비하던 백선엽 군단장은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 같다.
미국은 이미 휴전회담으로 가고 있었고 전선은 참호전 등 고착상태에 들어갔다. 밴 플리트 장군은 이 소강기를 이용해 한국군의 사단급 훈련과 도미 유학 등 한국군 증강을 유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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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밴플리트는 강직하면서도 친밀도가 높아 이승만 대통령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수많은 난관을 극복하며 전투와 한국군 증강 양면에서 헌신했다. 그는 이 대통령에게 한국군의 통솔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웨스트포인트 같은 4년제 사관학교가 있어야 한다고 강조해 1952년 4월, 육사가 진해에 탄생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어 육사가 군사 원조 리스트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정부예산으로 운영되어야 했기 때문에 초기에 궁색했지만 밴 플리트 장군은 여러 경로로 모금 활동을 벌여 육사가 태릉으로 이전한 후 이 모금으로 도서관을 세우는 데 결정적 도움을 주었다.
또 한국군을 속초 남쪽 FTC(Field Training Command)에서 1개사단씩 훈련도 시켰고 매 6개월마다 보병 150명, 포병 100명씩을 뽑아 1951년부터 1953년까지 5차에 걸쳐 6개월간씩 작전교육을 시켜 최전방에 지휘관이나 작전장교로 투입 했다.
▼ 진해 육사 생도들의 분열시 1952.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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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아주 포트 베닝(Benning)의 보병박물관에는 한국군 졸업생 1000명의 명단 이 새겨져 있다. 군단장, 사단장급은 캔자스(Kansas) 주의 포트 리벤워스 (Leavenworth) 육군참모대학에 보내졌다.
백선엽, 정일권, 장도영, 최영희, 송요찬, 임부택, 이종찬, 정내혁, 박병권 등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퇴임 후 플로리다 주 폴크 시티(Polk City)에 살았는데 사는 지역의 거리가 ‘밴 플리트 스트리트’라고 명명될 정도로 미국인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는 한국이 오늘의 막강 군대의 초석을 만들어 내었고 육군사관학교의 설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으며 장교, 장군 등 고위직 장성들이 미국에 유학가서 제대로 된 미국식 교육을 받게 한 장본인 이었다.
그리고 그는 1992년 10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1990년 투병시기에 한국에서 방문한 백선엽장군의 위문을 받으며 병석에서도 한쪽 팔을 받치며 거수경례를 하던 장면은 눈물을 글썽하게 한다.
▼ 미 조지아주 보병박물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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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그러한 그도 한국전쟁에서 아들을 잃었다. 그의 아들이 B-26폭격기 조종사로서 1952년 4월 북한에서 야간폭격 임무를 수행하던 중, 적의 대공포에 맞아 실종된다.
밴플리트 장군은 그날 오전 공군사령관으로부터 아들의 실종소식을 들었지만, 다음날 한국군 2군단 창설식에 참석했다고 한다. 그의 아들 지미 밴플리트 2세는 공군 중위였으며, 그리스에서의 근무를 마치고 본국에 돌아와 있었다.
그는 한국 전출 명령을 받자 어머니에게 이런 요지의 편지를 썼다.
‘눈물이 이 편지를 적시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전투중에 B-26 폭격기를 조종할 것입니다. 아버지는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 없이 살 수 있는 권리를 향유할 수 있도록 싸우고 있으며 드디어 미력하나마 저의 힘을 보탤 시기가 온 것 같습니다.
저를 위하여 기도하지 마십시오. 그대신 나의 승무원들을 위해서 기도해주십시오. 그들 중에는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아내를 둔 사람도 있고, 아직 가정을 이뤄본 적도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 아들이 싱종되자 밴플리트 장군의 논물을 보았다고 하는 백선엽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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밴플리트 장군은 아들을 구출하기 위한 수색을 교범에 있는 정도껏 하라 명령했고 결국 아들의 소재를 파악하지 못했다. 그 후로도 그는 가끔 아들이 실종된 지역의 지도를 물끄러미 바라보곤 했다고 한다.
그랬기 때문일까. 그는 1992년 본국에서 향년 101세로 운명할 때까지 한국을 못 잊어 했다고 한다.
후일 대통령이 된 아이젠하워가 한국을 방문하여 밴 플리트에게 묻기를... "나의 아들이 전선에 있는가? 그렇다면 후방으로 빼주게!" 순간 밴 플리트는 오해 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이젠하워는 이어 "내 아들이 전방에 있다 포로라도 되면 장군의 군사작전을 방해 할 것이다."
이 한마디에 오해를 풀고 즉각 경례를 했다는 후문...
▼ 아이젠하워와 한국전에 참전한 그의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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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밴 플리트 장군은 다른 8군사령관과 다른 점이 있다. 다른 사령관들은 영전해서 본국으로 돌아가거나, 본국에 가서 퇴역을 하면 한국으로 출장이나 오는 정도였는 데 밴 플리트 장군은 달랐다. 한국과의 인연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해 지속적 으로 한국의 발전을 도운 것이다.
밴 플리트 장군은 퇴임 후 한국전쟁이 휴전되자 아이젠하워 대통령의 특사로 와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군사원조와 경제원조 문제, 그리고 황폐화된 한국의 재건·부흥 을 위한 문제를 협의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그 후에도 수시로 이승만 박사를 만나 러 방한했고 아이젠하워 행정부 주변에서 한국의 대변인 역할을 했다.
또한 20세기 폭스와 한국영화계도 연결시켰다. 한 번은 대한극장에 10만 달러 융자를 주선해 주었는데 그 빚을 갚지 않는 바람에 보증인을 선 자신한테 빚 독촉이 왔다고 하소연도 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에 목장도 세우려 했다.
▼ 1961. 11월 미국 방문한 박정희의장과 밴플리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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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호텔 809호실 스위트룸에 머무르면서 수시로 경무대와 연락, 각 부처 장관들 과 미 대사관을 방문하곤 했다. 1959년에는 태풍 ‘사하라’가 부산을 휩쓸고 가자 김종오 육군참모차장과 함께 부산 피해지역을 방문, 위문하고 제주도 목장을 둘러 보고 돌아왔다.
5.16이 일어나던 해도 7월 들어 밴 플리트 장군이 방한해 박정희 의장, 송요찬, 김종필 등과 만나더니 얼마 후 다시 대대적인 경제인 그룹을 인솔하고 왔다. 블로크녹스(Blawknox), 웨스팅하우스(Westing House), 걸프 오일(Gulf Oil) 등 각 분야의 사장단이었다.
밴 플리트 장군은 김종필 전 중앙정보부장의 1차 외유 때도 미국에서 산업시찰 (Blauknot, Gulf, Reynold)을 하고 미국 유력인사를 만날 수 있게 도왔고, 그것이 결국 한·미경제협력을 돕는 길이 되었다. 한국의 국력이 약하고 로비의 힘이 없을 때였다.
김현철 특사가 미국으로 왔을 때는 빌 로저스(Bill Rogers) 전 국무장관들을 초청, 만찬도 주선했고 1957년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직접 만들어 한국의 대변자가 되었다.
▼ 1962. 5월 밴플리트 경제단장 및 28명의 내한 실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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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에필로그 밴플리트 장군이 1962년 보리가 푸르게 자라던 5월 울산에 다녀간다. 주한 UN 사령관을 지낸 밴플리트 장군은 그해 미국 저명 실업인 28명을 이끈 경제단장 으로 울산에 왔다.
함께 온 미국실업인은 제너럴모터스 웨스팅하우스 다우케미컬 등 세계적 대기업 들을 비롯해 화학 비료 정유 제강 등 쟁쟁한 미국 산업계 각 분야의 핵심기업 대표가 망라됐다고 한다.
울산에 온 밴플리트 장군 아니, 단장은 자신이 이끌고 온 미국 경제인단에게 통 사정을 해야했다. 박정희 혁명정부가 국가재건을 위해 미국경제인 투자를 유치 하려고 아직 불도저로 땅도 닦지 않은 곳에 초청한 것이다. 불과 3달전에 박 장군 이 직접 울산에 내려와 기공식과 함께 ‘울산공업센터’ 간판을 내건 터였다.
미국경제단이 도착한 그때는 공단은커녕 보리가 한창 자라고 있어 도무지 투자 자 마음을 끌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한국측은 할수 없이 UN군사령관으로 있으 면서 한국의 농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밴플리트 단장에게 잘 설명해달라고 부탁 했다.
밴플리트 단장은 특유의 사람좋은 유머를 섞어 한국의 보리고개에 대해 설명 했다고 한다. 단장의 설득을 들은 미국 경제인들이 사정을 이해하겠다는 듯 고개 를 끄덕임으로써 자칫 울산의 개발, 아니 한국의 경제개발이 좌절될수 있는 문제 가 해결됐다.
▼ 박정희 의장, 이병철 회장 그리고 밴플리트 장군
★★★ 그는 한국에 심어 놓은 씨앗이 영글어 가도록 끊임없이 가꾼 우리나라의 숨은 공로자이다. 그가 작고하자 만든 "밴 플리트"상 ★★★
백선엽 예비역 대장이 밴 플리트 상을 받았다. 이 상은 밴 플리트 장군이 작고하자 그를 기리기 위해 1992년부터 코리아 소사이어티에서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에 크게 기여한 인물에게 수여하는 상이다.
김철수 세계무역기구 사무처장(1995), 제임스 레이니 대한민국 주재 미국 대사 (1996), 구평회 한국무역협회장(1997), 최종현 SK그룹 회장(1998),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2000),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2004), 조지 H. W. 부시 전 미대통령 (2005),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2006), 김대중 전 대통령(2007), 정몽구 현대·기아 자동차그룹 회장과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2009) 등이 이 상을 받았다.
▼ 미국에서 밴플리트 상을 받는 이건희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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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즈음 이틀간은 장마가 주춤하고 덥기는 했지만 화창했습니다.
반짝 좋은 날씨를 이용하여 가까운 불암산에 등산을 하였습니다.
물소리와 새소리가 등산객들을 즐겁게 해주고 있습니다.
또 장마비가 내린다고하니 대비를 해야할 듯 합니다.
건강에 유의하시고 즐겁고 보람있는 날이 되었으면 합니다.
새벽에 인사 드리는 것이 원칙이나 이런 저런 일로...
6.25때 뽑았던 글인데 늦었습니다. 벽안의 미국인 장군의 한국을
사랑한 이야기 올려 드립니다.
고란초님 내일부터 이틀간 계속 장맛비입니다. 더운 여름에 즐겁게
지낼 아이디어라도 모색해 보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