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저의 아내가 이처럼 난을 좋아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고란초도 이렇게 해주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지만....
(고란초의 컴퓨터 마우스 그림집에서) -
蘭과 아내
나는 언젠가부터 난에 빠지기 시작하여 이젠 너무나도 깊숙이 빠져 헤어나질 못하고 있는 처지가 된 상태이다. 난이란 풀꽃이 뭐가 그리도 좋은지 나도 모를 일이나, 하고 많은 화초 중에 하필이면 난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역시 알 수가 없다. 수많은 날들을 채란 한답시고 깡그리 산행에 쏟아 부었으며, 웬만한 난가게 주인도 하도 뻔질나게 찾아다니는 통에 곁을 스쳐만 지나가도 알아 볼 정도가 되었으니,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라지만 자연히 마누라가 참견하지 않을 수 없게끔 되었다. 이건 비단 나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도가 지나치게 된 것 같다.산채하거나 난가게서 사 모은 난들이 하나 둘씩 모여 난실 가득 차고 넘쳐흐를 즈음, 퇴근하기가 바쁘게 매일 같이 난의 시중을 드느라 난실 속에서 시간을 물 쓰듯 보내고, 멋쩍은 표정으로 한 밤중 잠든 마누라 옆으로 살그머니 기어 들어가니, 낭만적 접근은 고사하고라도 고이 잠든 마누라를 깨우게 되어 요즘은 마누라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진 상태다. “난이 그렇게도 좋으면 난과 결혼해 같이 살지 그래요?” “난이 중요해요? 애들이나 아내가 더 중요해요?” 허구한 날 독기어린 핀잔을 들어가면서도 오늘도 또다시 발걸음은 난실로 향한다.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직장에서 퇴근하기가 바쁘게 난실로 직행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마누라가 온데간데 없었다. 어딜 나갔나, 잘 됐구나 싶어 잽싸게 난실로 뛰다시피 들어갔다. 난실문을 열고 난을 살피는 순간 나는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나도 모르게 반사적으로 뒤로 주춤 물러서며 가슴이 덜컹 내려앉은 것이다. 무슨 일이 난실 속에서 일어났을까? 모두가 궁금하리라 여겨진다. 난데없이 난실 속의 난에 파묻혀 웬 여자의 얼굴이 나의 망막 속에 맺힌 것이다. 그것도 빙긋이 웃으면서 말이다. ‘웬 여자였냐구요? 바로 내 마누라지 누구겠어요.’ 그래서 시치미 딱 떼고 웬일로 난실을 다 왔느냐고 하니까, 자기도 이제부턴 난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무슨 소린고 했더니 난을 바라보듯 자기 얼굴을 바라봐 달라고 하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뭔가에 뒤통수를 쾅 얻어맞은 듯 머릿속이 멍해짐을 느꼈다. “당신이 하도 난에 빠져 내 얼굴은 아예 남의 집 똥개처럼 취급하니 이렇게라도 할 수 밖에 없잖아요?” 결국 그 날 나는 온갖 독기어린 비난의 화살을 집중적으로 받고 말았다. 이제부터라도 나도 반성 해야겠다 결심하고, 사실 마음에도 없지만 마누라를 한번이라도 껴안아주고 눈치를 살펴 쥐에게 접근하는 고양이마냥 소리 죽여 살금살금 난실로 올라가야만 했다.
산채를 가는 데도 역시 문제가 뒤따르게 된다. 산행을 어렵게 만드는 것은 날씨나 독사나 독충, 덫 등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마누라의 바가지다. 이건 숫제 폭거이다. 애쓰게 캐온 난들을 박살내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질 않나, 모처럼만에 이뤄진 다른 사람과의 산행 약속도 여지없이 파기시켜 버린다. 마누라에게 점수를 많이 따야만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을 텐데... 으이구! 나는 점수를 따기는커녕 계속 잃고만 있으니 어디다가 하소연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차라리 독신으로 살았더라면 이런 문제는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을 텐데 …… 그래서 한 가지 꽤를 고안하였다. 산행에서 돌아오는 날에는 애들이 좋아하는 과자랑 아이스크림 등을 한 보따리 싸들고 들어가거나 집안 청소, 설거지 등 마누라가 시키지도 않은 일들을 손수 하는 것이다. 보통 때는 남의 일 보듯 하는 것이나, 산채만 갔다 오면 휘파람까지 불어대며 해대니 마누라가 웬일인가 하고 여길 수밖에. 그런 연후로 산채를 오히려 더 자주 내보내게 되는 듯 했고,처음엔 의아스러운 눈초리로 날 바라보더니 이제는 아에 당연히 해야 만 될 일로 여기는 듯 했다.그렇지만 막상 피곤한 몸을 이끌고 하고 싶지 않은 이런 일들을 해야만 하는 내 자신이 가련스럽게까지 느껴지고, 남이 들으면 별스런 놈 다 보겠다고 손가락질 받지나 않을까 두렵기까지 하다. 결국 마누라에게 아부를 많이 해야만 난들이 무사할 것이고 산채가 가능할 것 같으니 세상 살 맛이 안 나지만 할 수 없는 일 아닌가? 산채 초기, 처음엔 아내에게 바치는 난이라는 둥, 난의 명명을 마누라의 이름자로 하겠다는 둥, 얼렁뚱땅 넘어가려해도 통했지만 이젠 이런 것은 어림 반 푼어치도 안 통한다.
그래서 두 번째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이것이다. 이것은 거의 성공을 거두었다. 그 방법이 무엇일까가 궁금할 것이다, 혹자는 마누라에게 밤 서비스를 잘 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할 것이고,또 어떤 이는 마누라에게 관심이 많이 있어 보이도록 여우털 목도리라든가, 밍크 코트 내지는 때깔이 멋진 잠옷 따위 등을 결정적인 시기에 선물해주면 될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방법은 극심한 육체적, 정신적 노동뿐만 아니라 경제적 손실이 많아 나에겐 부적당하다. 혹시나 마누라가 밤 서비스를 받을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 그래서 이런 방법이 아니라 돈 안 들이고, 간편하며, 노동을 안 해도 되는 간단한 방법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사람마다 개인적으로 좋아서 하는 일이 있다. 내 마누라는 도가 지나쳐 그 일을 안 하면 못 베기는 상태인데 바로 그 점을 이용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직장에 있는 동안 마누라가 하고 있는 일들을 알아내게 되었다. 그건 밥 먹고,설거지하고, 빨래하고, 청소하는 등 집안의 자질구레한 일이 아닌 다른 일이다.
언제부터인가 자기가 마치 자선가나 되는 모양으로 피 땀 흘려 애쓰게 벌어다 준 돈을 가지고 고아원이다, 양로원이다, YMCA다 쏘다니며 씀씀이를 헤프게 하고 있었고, 자기가 아니면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이 없다할 정도로 뻔질나게 돌아다니고 있었으며, 점심 식사 후 마누라가 보고 싶어(실은 난이 보고 싶어서 가는 경우가 많지만) 집에 와 보면 텅 빈 썰렁한 집안 분위기를 수시로 맛보았기에 때는 바로 이때다 하고 나도 참견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 뿐이랴? 자기가 외국에서 살 것인지 어떨 것인지는 몰라도 영어회화 교습이다, 엉뚱하게 필리핀 말인 따갈로그 교습이다, 뭐다 하여 이리 저리 나들이는 보통이고, 요즘은 아에 정신 나간 사람 같은 외국인까지 집에다 들여 놓고 영어강습 받느라 혀도 잘 돌아가지 않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이젠 남편 바가지 맛도 좀 보여줘야만 되리라 여겨져 간섭을 하기 시작했다. 어찌나 만나기만 하면 들들 볶아 댔는지 나는 내 일을 하고 아내는 아내 일을 하는데 있어 일체 서로 참견하지 않기로 약속하고 말았다. 이리하야 자연스럽게 난을 돌보고 난을 캐러 갈 수가 있게 된 것이다. ‘아무렴! 내가 언제 아내의 사생활을 간섭했던가?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남의 약점을 악용하는 것만 같아 좀 비열하게 여겨질지도 모르지만, 마누라에게 덜미를 잡혀 찍소리도 못하고 지내는 것 보단 백번 더 났지, 안 그래요?’ 이 방법이 언제까지 성공을 거두려나는 두고봐야 되리라 여겨지지만 아무튼 괜찮은 방법임에 틀림없다.
난과 아내, 둘 중 하나만 선택하라면 물론 아내를 먼저 찍을 수밖엔 다른 도리가 없지만 이왕지사 내가 좋아서 하는 난을 마누라가 조금만이라도 이해해주는 것도 중요하리라 본다. 지금까지 솔직히 말해서 마누라에게 그것(고것이 무엇인지는 여러분 각자의 상상에 맡김) 하나 빼고 잘해 준 것도 없는 내가 별 것을 다 요구한다고 보는 이도 있겠지만, 역시나 나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세상에서 둘도 없는 마누라일 것이다.그 다음이 애첩(?)인 난이 아닐까 하고 여겨진다. 난은 죽어도 괜찮지만 마누라가 죽는다면 내 인생은 끝장 날 테니까 말이다. (혹시 이글을 읽는 분들이 보면 표현이 너무 지나친 것 같다고 할 것만 같은디.) 이제부턴 마누라를 난보다 더 사랑하면서 지내리라고 작심해본다. ‘이건 농담이 아니라 나의 진정한 본심이니 여러분, 이 사람 말을 한번 믿어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