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과 20년사(挱)

2011. 10. 22. 13:23은사님의 글

 우리 님들 저의 은사님께서 의대 소아청소년과학 교수 20년을 지내오면서 느끼셨던 생각과 느낌을 글로 남기신 것을 소개하겠습니다. 이미 오래 전의 일이라서 시대와 동떨어진 면이 다소 보입니다만 그래도 과의 주임교수로써 고난의 역사를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만 해보시기 바랍니다.

  

                      소아과 20년사


 밤을 지새우고 숱한 입김을 불어넣고 힘을 다했는데도 보람 없이 싸늘해진 어린애를 부여안고 넋을 잃은 어머니를 대할 적마다 나는 터무니없는 생각에 잠기곤 한다. 이 몰골은 어차피 지옥행이다. 이다지도 티 없고 맑은 삶이었으니 저승서는 반드시 천당에 자리 잡을 게 아니겠는가? 언제든 내가 염라대왕 재판정에 섰을 때 저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 녀석이 우리를 죽인 돌팔이요' 입을 모아 증언해댈 테니. 이 이상 내가 꼬마들만 상대하단 천당과는 숫제 반대쪽을 달리는 것이 아니겠는가고……

 애당초 기다무라(北村)교수라는 선생님께 홀까닥 반해 소아과를 택했지, 개구쟁이들이 귀여워 고른 길은 아니었다. 중국서 학교를 마치고 갓 입국했을 녘엔 꼬마둥이들 깩깩거리는 진저리에 여간 골탕먹은 것이 아니었다. 그때만도 폐렴하면 가히 사형선고요, 결핵성뇌막염은 백발백중 죽어야하는 세상이었다. 수삼 년 비벼대는 사이에 글투나 말투까지 선생님 닮아가는 주제가 대견스러웠고, 어느덧 죽은 놈은 아예 제 팔자소관이며 살아나면 무조건 내 생색이었다. 그 고장에 흔한 흑열병 환자를 서른 나무 명 입원시켜 새 치료법을 연구해보느라 정신팔려있던 무렵 해방에 이르렀다.

 고작해야 쾌쾌한 양말조각이나 들었을 봇짐꾸러미 틈바구니에 끼어 고국이랍시고 찾아들어 여기저기 기웃거린 나머지, 몇 해 동안 이 곳 광주구경이나 해보자던 게 이러구러 도합 스무 해란 숫자가 꽉 차버린 셈이다.

 공부 길로 넓게 헤맨 바도 아니오, 외곬으로 파고든 것도 없이 겉이나마 어린애 의사 치레를 꾸려온 게 정말 어이없으면서 한편 가상스럽기도 하다. 아무튼 첫 삼년 동안의 밑천으로 다섯 곱이 넘는 햇수를 울거먹고 발라 마치다보니, 엊그제만도 교실 초독회에서 젊은 의사들이 모여 몽고증이란 체염색체의 몇 번째가 운운하는 폼이 내 귀엔 경 읽기요, 또 언제든가 꼬마둥이를 열 한 시간이나 몽혼을 시켜놓고 오장육부를 뒤집고 엎은 다음에도 단잠에서 깨어난 듯 거뜬히 눈뜨는 것을 본 내 자신이 되레 소스라쳤다. 그런가하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항생물질들이 얼마만큼 세균을 몰살시킬지 모르지만, 사람의 병을 고쳐주는 것은 아닌데도 진짜 가짜 가릴 것 없이 어찌나 설먹고 엇맞은 것인지 열도 기침도 없이 심해진 폐렴이 있는가 하면, 급성뇌막염인지 결핵성인지 분간 못 하게시리 증세들이 신출귀몰 둔갑하는 서슬에 미국 책만 믿다가는 자칫 봉변당하기 일쑤인지라, 정말 점쟁이가 부러울 지경이다. 또 배를 곯다 못해 허기에 지쳐 가스랑거리는 숨길을 약으로만 지어 잡으라고 성화대다, 죽으면 이것도 가짜의사 탓으로 몰려 운이 좋아야 주먹다짐이다. 이럴 땐 백성들 밥 먹이는 연구를 하는 사람들이 원망스럽다. 뭣 때문에 의사에겐 무작정 사기꾼 대접인지 도대체 말을 들어주지 않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그러기에 난 가끔 의사들이 병에만 지나치게 정신 팔려있는 나머지 사람을 잊고 있는 탓이 아니겠는가고 뉘우쳐보기도 한다. 이렇도록 시달리고만 지나다보니 이제 와서는 내가 주는 아스피린이라도 먹고 요행 병이 나으면 제 명이 긴 소치요, 내 손으로 주사라도 한 대 맞은 놈이 죽으면 딱히 내 잘못으로 그런 것만 같아지는 게 옛날과는 딴판으로 자꾸만 겁에 질린다.

 인간을 다루는 것이 이다지도 고되고 벅찬 일인가고 새삼 풀죽어 있는 체신보고, 그래도 대학접장이 아니냐고 하는 데는 금시로 낯이 꾸릿꾸릿해지면서도 지금부터라도 늦진 않으니 어차피 돈은 없는 터, 몸을 팔아서라도 새판잡이 공부라는 것을 시작해볼까 했다가도, 요즘 학자님들이 우리네 바탕을 잊고 허공에 뜬 구름잡이 연구만 하고 있는데 사뭇 못마땅해, 뭣보다도 긴박한 것은 우리나라 어머니를 향하여 아주머니들이여, 그대들의 서방님들이 밥만 먹고 못산다는 걸 알았거든 갓난이들도 다섯 달이 지나면 젓만 가지곤 못사는 법이라우……부르짖으며 방방곡곡 북이나 꽹과리를 치며 싸대는 딴따라가 되든지, 신식말로 샌드위치맨이 되는 길이 첩경이 아니겠는가고 제법 애국애족도 해본다.

 지난 가을부터는 느닷없이 눈이 멀어지기 시작했다. 단어를 찾으려면 팔꿈치를 쭉 뻗어 콘사이스를 불 곁으로 바득바득 들이대야 하고, 글을 쓰자면 고개를 사정없이 뒤로 추켜올려야 한다. 항차 펼치는 책마다 자질구레한 데이터인지 숫자에 그만 주눅이 들었다. 한 개를 가까스로 외우고 나면 두 개는 달아나는 이미 굳어버린 골통 탓인지 모르지만, 사람의 생명을 숫제 산술로 풀으려는 듯한 느낌이어서 울화통이 터지며, 현대의학이란 게 이렇게 가다가는 항아리 깨는 격이 되지 않을까 적이 걱정도 해본다.

 이래저래 한결 안절부절 괜스레 짜증만 늘고 일손이 잡히지 않는다. 살기가 전보다 팍팍하고 구차해진 때문인지, 아니면 산아제한 한답시고 생 사나이 불알을 함부로 까재끼는 어지러운 세상 탓일까고 친구에게 투덜거렸더니, '이 사람아, 그게 바로 갱년기 장애라는 걸세. 아낙네 같으면 월경이 없어지는 서슬인데 그만하기 다행이지' 짓궂게 뱉는 말에 무릎을 쳤다.

 비로소 깨달은 지각이란 게 내게 그나마도 이 재주가 없었던들 지나온 가지가지 아슬아슬한 고비마다 못돼 먹은 성질에 진작 뼈가 으스러졌거나, 사나운 주둥아리가 꽁꽁 얼어붙었을 게 아닌가 생각 들어 한밤중 아픔에 간드러지는 꼬마들의 울부짖는 소리가 곤백 번 내 단잠을 앗아갈망정 기위 지옥행은 굳혀놓은 터, 죠스란이나 슈베르트의 자장가 폭 대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체념하고 또 스스로 다짐하는 것이다.

 이렇듯 허황하게 지나온 나날을 이제 와서 새삼 넋두리 해댔자 하염없는 노릇이지만 당장이라도 내 선생님이 이 맹추야, 스무 해라면 네 인생의 3분지 1이나 되는데 그래 주먹구구해 본 것도 없었더냐?' 벼락이 내린다면 무릎을 꿇고,

 “아, 아니요. 있습니다. 없는 건 아닙니다. 의사들마저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소중한 것은 사람의 생명이 아니겠습니까?”

 목 놓아 부르짖으리라 마음먹고 있다.

 하나밖에 없는 딸 놈이 이젠 대학생이다. 될 말이라면 다 걷어치우고 학교나 같이 따라다녔으면 하는 것만이 내 20년 동안 해먹은 돌팔이, 골목대장의 솔직한 고백이라 하겠다.



.................................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의사가 생각보다는 고달픈 직업이지요. 인간의 생명을 다루는만큼 많은 위험도 감수해야만 합니다. 최선을 다했어도 결과가 안 좋으면 죄인 취급을 당하고, 견디기 힘든 수모를 당합니다. 이와는 반대로 죽어가는 환자를 살려내면 명의 소리도 듣게 되겠죠. 특히 소아청소년과는 환자의 부모를 잘 못 만나면 돌팔이 소리를 듣기도 합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부모의 판단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되기 때문이지요.
 저의 은사님께서 쓰신 글이라 후기를 달 수가 없습니다만 저 역시 이런 과정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대학교수는 안 해봤으니 약간 차이만 있을 뿐이지요.
  우리 님들 모두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은사님의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마음과 눈  (0) 2011.10.29
의사가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0) 2011.10.22
암탉의 수난  (0) 2011.10.22
오환(五圜)과 사백 환(四百圜)  (0) 2011.10.22
토양(兎孃) 성혼식(成婚式)  (0) 2011.1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