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석같은 심리학 속설'을 해부하다(3)...비타민 심층 취재(3.바르게 먹기)

2011. 11. 12. 14:05화석·청천리님 방

 

'철석같은 심리학 속설'을 해부하다(3)...비타민 심층 취재(3.바르게 먹기)

2010.07.14 07:57 | 님들의 휴게실 | 화석

http://kr.blog.yahoo.com/goran5006/2176 

 

우선 클릭하여 한 곡 들으시며...


         

 


 

    
   < 어제 이야기 계속입니다. >

 릴리언펠드 교수를 만난 것은 지난달 월드컵에서 한국 대표팀이 그리스를 2대 0으로 
 이기고 나서 사흘 뒤였다. 그는 좌뇌형, 우뇌형 논란을 월드컵에 비유해 설명했다.

  "만일 제가 '한국이 그리스를 100대 0으로 이겼다'고 한다면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한국이 이기긴 했으니 약간의 진실이 섞여 있긴 하지만 100대 0은 과장이고,
    사실이 아닌 것이죠.

                   


       로이터 연합뉴스...
 ‘운동선수들은 큰 경기를 앞두고 성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는 것도 심리학 신화 중 하나이다. 

                                     연구결과 섹스는 평균 50kcal를 연소시킬 뿐이며
                                     근육을 약화시키지는 않는다. 출처:〈유혹하는 심리학〉


   하지만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일이 대중심리학(pop psychology)에선 매우 흔하게
   벌어집니다. 뇌의 양쪽을, 전혀 다른 세계관을 가진 두 명의 다른 사람처럼 보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거기엔 약간의 진실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연구 결과 좌뇌와 우뇌는 기능 면에서 매우 비슷합니다.
   대중심리학자들의 주장에는 엄청난 과장이 있습니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뇌의
   두 반구 사이에 늘 커뮤니케이션이 오고 간다는 겁니다.

   한쪽이 다른 쪽과 독립적이지 않고 늘 대화를 나눈다는 것이죠."
                                                                                          <겹황매화...강화도님
   

 

 

 


좌뇌와 우뇌가 균형을 이루는
  '양뇌형(兩腦型)' 혹은 '전뇌형(全腦型)' 경영자가 될 수 있다면 최선일 것이다.


   ■좌뇌와 우뇌의 차이는 너무 과장됐다

   - 우뇌가 없으면 좌뇌가 우뇌의 일을 대신할 수 있다고도 하던데 사실인지요.

  "그렇습니다. 뇌의 한쪽 반구가 손상을 입으면 다른 반구가 그 기능들을 대신한
   연구 결과들이 있습니다. 신경과학에서 '가소성(可塑性·plasticity)'이라고 부르는
   연구입니다."

   - 예를 든다면?

  "만일 어떤 사람이 우뇌를 다친다면 사물을 시각화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공간 지각력이 떨어지고, 길을 찾기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좌뇌가
   그런 기능들을 대신한다
는 겁니다.

   바로 여기 에모리대에서 신경학을 연구하는 분들도 그런 사실을 밝혀냈어요.
   이는 좌뇌와 우뇌의 차이에 관한 이야기는 아니겠지만, 뇌라는 게 얼마나 유연한가
   하는 것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왜 그런지 이유는 뚜렷하지 않습니다."

 
  - 좌뇌와 우뇌가 차이점보다 유사점이 많다니 뜻밖입니다.

  "사람들은 차이를 강조하죠. 재미있고 극적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보를 처리하는
   기본적 방법에 있어서 둘은 차이보다는 닮은 점이 훨씬 많습니다. 뇌의 한쪽 반구가
   다른 반구가 할 수 있는 기능을 수행하지 못하는 게 아닙니다.

   다만 한쪽이 다른 쪽보다 좀 더 빠르고 뛰어나게 수행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 질 볼트 테일러(Taylor)라는 뇌 과학자가 뇌졸중으로 한때 좌뇌 기능이 마비됐을
     때 정신적으로 '열반'을 경험했다는 강의를 TED(세계적인 지식 콘퍼런스)에서 해서
     큰 화제가 됐습니다. 그녀는 "우리가 우뇌 깊숙이 들어가는 데 시간을 쏟을수록 우리는
     세상에 더 많은 평화를 투사하게 되고, 지구는 훨씬 평화로워질 것"이라고도 했다.

    

 



  "그녀의 책을 보지 못해 판단을 유보해야 하겠지만 상당히 극단적인 주장처럼 들립니다.
   그녀가 매우 극적인 체험을 했고,그것이 그녀의 세계관에 큰 변화를 가져 왔다는 것은
   이해가 갑니다.

   하지만 세상을 생각하는 한 가지 방식이 다른 방식들보다 본질적으로 낫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섣부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심리학에서 배우는 게 있다면 직관과
   영적인 것, 신비주의적인 것도 필요하지만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것도 필요하다는 것.

   
물론 직감과 예감도 중요하지만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것들을 뛰어넘을
   수 있어야 합니다
."

   그는 목소리를 높이며 말을 이었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겪었던 금융위기란 것도
   부분적으로는 사람들이 육감과 직감을 너무 믿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자연이 우리에게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을 준 것은 우리의 직감이 잘못됐을 때 그것을 조절하라고 한 것은
   아닐까요?"

   그의 말은 우뇌를 '물신 숭배' 하는 데 이른 요즘 경영계에 경종을 울리는 것처럼
   들렸다. 늘 그렇듯이 뇌도 균형이 중요한 것이다.

 


3.‘13가지 생명의 묘약’ 비타민, 바르게 먹는 법
   - 비타민C 1000mg= 키위 40개, 식품·보조제 함께 섭취해야



   비타민은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물질이다.

   필요한 양은 적지만 몸의 필수 기능을 조절하는 데 없어선 안 되는 역할을 한다.
   부족하면 잇몸과 피부에서 피가 나는 괴혈병(비타민C 결핍), 손발이 붓고 마비되는 
  각기병(비타민B1 결핍),
척추가 구부러지는 구루병(비타민D 결핍) 등에 걸리게 된다.

   탄수화물ㆍ지방ㆍ단백질처럼 에너지를 내는 영양소와 구분해 조절 영양소에 속한다.
   비타민은 우리 몸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반드시 음식이나 약(보충제)으로 먹어야
   한다.

   그런데 일반인의 비타민 상식은 중ㆍ고등학교 생물수업 시간에 잠깐 배운 정도를 별로
   벗어나지 못한다. ‘비타민 디자이너’란 직함으로 비타민의 중요성을 널리 알리는 활동을
   하는 좌용진(41)씨의 도움을 받아 비타민에 대한 궁금증과 오해를 풀어봤다.

   서울대 약학과를 졸업하고 제약회사 연구원으로 일했던 좌씨는 2006년 『비타민 혁명』
   이란 책을 펴냈으며 현재 ‘스마타민(www.smartamin.com)’이란 업체의 대표를 맡고
   있다.
                                                                            < 행운의 파랑새... 강화도님>
   

 

 

 

 



   사실 채식 위주로 균형 있는 식사를 하고 열심히 운동하면서 스트레스가 별로 없는
   사람은 비타민 보충제가 크게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현대인은 비타민이 풍부한 자연
   식품보다 공장에서 만든 가공식품과 패스트푸드를 즐겨 먹는다. 또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운동량은 대체로 부족하다.

   그 결과 탄수화물ㆍ지방ㆍ단백질에서 얻는 열량(칼로리)은 남아돌고, 소량이라도 우리
   몸에 꼭 필요한 비타민ㆍ무기질은 부족하기 십상이다. 식사와 별도로 비타민을 보충해
   줘야 하는 이유다. 비타민은 의약품이라기보다 ‘알약으로 된 반찬’이라 할 수 있다.

   흔히 비타민은 보충제로 먹을 때보다 음식으로 먹을 때가 흡수가 더 잘된다고 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비타민의 용량이란 문제를 무시하고 있다. 음식만으로는 비타민을
   충분히 먹기가 어렵다. 예컨대 과일 가운데 키위에 비타민C가 풍부하다고 한다.

   그런데 1000㎎의 비타민C를 섭취하려면 키위를 40개나 먹어야 한다.
   돈도 많이 들겠지만 아마 배가 불러서라도 먹지 못할 것이다.
   .
   .
   .
   자동차를 생각해 보자. 자동차가 없다고 살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동차가 있으면
   생활이 편리해진다.
비타민ㆍ무기질도 충분히 섭취하면 몸의 대사 활동이 원활해진다.
   그러면 열량 소비가 늘어나 비만을 예방할 수 있고, 스트레스에 견디는 힘도 강해진다.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삶의 질을 위해 비타민 보충제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종합비타민은 한알에 20여 가지의 비타민과 무기질을 영양권장량 수준으로 담아둔
   제품이다. 식사가 부실한 사람들이 영양 결핍을 예방하는 데는 효과적이다. 하지만
   단순히 결핍을 면하는 것이 아니라 몸을 최적 상태로 만드는 데는 부족하다. 

    < 까마귀 쫒기는 붉은배새매...ㅎㅎㅎ/강화도님 >
   


   예컨대 비빔밥은 영양학적으로 균형이 잘 잡힌 훌륭한 식사라고 한다. 
   그런데 비빔밥을 한 그릇이 아니라 끼니마다 한 숟갈씩 먹는다면 어떨까.
   영양학적으로 아무런 의미가 없다.


   비타민도 마찬가지다. 우리 몸에 좋은 작용을 하려면 충분한 양을 먹어줘야 한다.
   종합비타민은 한알에 여러 종류의 비타민을 담으려니 함량이 제한될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종합비타민을 선호한다면 하루에 여러 알을 먹거나 부족하기 쉬운 개별
   비타민을 섞어 먹는 방법이 있다.

   종합비타민을 고를 때는 제품 포장에 적혀 있는 성분과 함량을 꼼꼼히 살펴야 한다.
   특히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사람이라면 비타민 B1과 B2같은 B군의 함유량이 높은
   제품을 권한다. 단순히 몇 종의 비타민이 함유됐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한다.
   간혹 비타민 종류만 많고 함량은 부실한 제품도 있기 때문이다.

   한국영양학회는 5년마다 ‘한국인 영양섭취기준’을 발표한다.
   여기에는 13가지 비타민도 포함된다. 비타민의 섭취기준은 연령대와 성별에 따라
  ‘평균 필요량’ ‘권장섭취량’ ‘충분섭취량’ ‘상한섭취량’ 네 가지로 구분한다.

   권장섭취량은 대상 연령대와 성별에서 97~98%의 사람들, 평균 필요량은 50%의
   사람들에게 하루에 꼭 필요한 양을 뜻한다.
따라서 비타민이 부족하지 않으려면
   가급적 권장섭취량 이상을 먹어야 한다. 권장섭취량은 한꺼번에 많은 사람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단체급식 등에서 주로 참고하는 수치다.

   30, 40대 남성의 경우 2005년 기준으로 물에 녹는 수용성 비타민C의 평균 필요량은
   75㎎, 권장섭취량은 100㎎, 상한섭취량은 2000㎎이다. 충분섭취량은 정확한 자료가
   부족할 때 건강한 사람들의 영양섭취 수준을 관찰한 결과로 정한다.

   예컨대 11개월 이하 유아에겐 비타민C의 권장섭취량 대신 충분섭취량을 제시하는데
   0~5개월은 35㎎, 6~11개월은 45㎎이다.

    < 집주변에서 이런 감생이를 잡을 수 있다니...ㅎㅎㅎ/고락산성님 >
   

 

 

 



   상한섭취량에 대해선 오해하는 사람이 많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경미한 부작용도
   전혀 발견되지 않는 안전한 용량의 최대값
을 뜻한다. 사람에 따라 상한섭취량보다
   많은 양을 먹는 게 건강에 더 좋을 수 있다.

   상한섭취량을 초과하면 설사나 위장 자극, 두통 같은 부작용이 생길 수 있는데 대부분
   복용을 중단하면 곧 사라지는 가벼운 증상이라고 한다. 여러 전문가의 연구에 따르면
   비타민C의 경우 하루 1만㎎(10g)을 먹어도 심각한 부작용이 생긴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비타민은 맛이 별로 좋지 않다. 어른이라면 약으로 생각하고 물과 함께 삼키면 되겠지만
   어린이가 문제다. 대부분의 어린이는 성인 비타민 제품을 잘 먹지 않으려 한다.
   그래서 나온 것이 어린이 비타민이다. 어린이가 좋아하도록 단맛을 내는 성분을 많이
   집어넣었다.

   일부 어린이 비타민 제품은 두 가지 문제가 있다. 우선 단맛을 내기 위한 감미료ㆍ
   착색료ㆍ착향료 등이 지나치게 들어갔다. 대신 맛없는 비타민 성분은 줄였다.
   비타민이 들어갈 자리를 합성 첨가물이 차지한 것이다. 심한 경우 일반 가게에서
   파는 사탕이나 젤리에 비해 별로 나을 게 없는 제품도 있다.

   따라서 어린이에게도 성인 비타민을 조금씩 먹이길 권한다. 알약으로 먹인다면
   과자와 함께 주거나 가루로 먹인다면 설탕을 섞어 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다.

   흔히 미국·캐나다 등은 비타민 선진국이라고 한다. 그런데 함량이 정확하지 않은
   제품이 의외로 많다. 제조업체가 자율적으로 함량을 적어내는 신고제여서다.
   특히 해외여행을 갔다가 가이드의 ‘좋다’는 말만 믿고 비타민 제품을 사오는 사람은
   바가지를 쓰기 쉬우니 주의해야 한다.

   한국에선 비타민 제품을 만들어 팔려면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엄격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 함량 표시와 광고 문구 등도 식약청이 허가한 방식 외에는 업체가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따라서 국산 비타민은 함량 표시를 믿을 수 있다.

   국내에 정식으로 수입되는 비타민 제품도 식약청에서 검사를 받는다.
   일부 수입 비타민 제품은 해외 포장과 국내 포장에서 표시하는 함량이 크게 
   달라지기도 한다.


고향역/나훈아

1974년일 겁니다. 중학교 3학년을 마치고 방학 때 고향을 가게 되었는데고향 가니 또래의
친구들을 삼촌이 소개해 주어... 매일 밤마실을 나가 남학생 여학생이 한 집에 모여 막걸리
마시며 노래를 부르는데... 이 곡이었습니다. 막걸리도 난생 처음 마셔 보고선...

어찌나 구성지던지 바로 외워서 한 곡 부르고선...ㅎ 노래 못하면 쪼다라 뭐라 하면서...ㅎ
이젠 18번중에 하나가 되어버린...

 

   추석 명절 때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오는 가요가 있다. 
   매년 10월 31일만 되면
이용의 ‘잊혀진 계절’이 집중적으로 방송을 타는 것처럼. 

 돌발 퀴즈. 고향을 주제로 한 노래 중 애창곡 1위는? 가요 레퍼토리를 줄줄 꿰고 있는
   사람들은 금방 답이 나올 것이다.
만일 가물가물하다면 결정적인 힌트 한 개.
   나훈아의 히트곡 중 한국 성인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노래 1위. 

   답은 ‘고향역’이다.

  

                             

 
                     
       ▲ 작곡가 임종수

임종수 작사·작곡의 ‘고향역’. 이곡은 처음에는 ‘고향역’이 아니었다.
나훈아는 1970년 3월, 앨범을 내면서
당시 무명 작사·작곡가이던 임종수로부터 두 곡을 받아 불렀다. 

‘차창에 어린 모습’ 과 ‘그 사람을 버린 죄로’.

하지만 두 곡은 방송도 한번 타지 못한 채 묻히고 만다.
2년 뒤 나훈아는 ‘차창에 어린 모습’을 제목과 가사는
물론 리듬까지 바꿔 다시 취입한다.
그게 우리가 부르고 있는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으로 시작하는 
‘고향역’이다.
국민애창곡 ‘고향역’이 탄생하는 과정은 1970년대의 사회·문화상을 고스란히 응축하고 있다.

▲ 왼쪽이 임종수, 오른쪽이 나훈아

  노래 취입 후 가수 포기… 작곡가 도전

1970년대 한국 음반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회사는 오아시스레코드사와 지구레코드사.
당시 최고의 인기가수 나훈아는 오아시스레코드사 전속이었다. 오아시스레코드사는
서울 청계천 8가, 평화시장 건너편의 건물 3층에 있었다.

1970년 1월 어느 날 아침, 오아시스레코드사에 행색이 초라한 젊은 남자가 찾아왔다.
여직원은 손으로 볼펜을 돌리며 이 남자의 입성을 훑어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어떻게 오셨어요?” 남자는 여직원의 태도에 몹시 불쾌했지만 꾹 참고 ‘어떻게 왔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남자는 자신을 작곡가라고 소개하고 사장님을 만나게 해달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직원은
“사장님이 안 계시다”며 거절한다. 다음날부터 남자는 매일 똑같은 시간에 오아시스
레코드사에 출근한다.

   남자는 무명작곡가 임종수(林鍾壽·당시 28세).

    

가수가 되기 위해 무작정 상경했다가 가수의 꿈을 접고 작곡가로 진로를 바꾼 임종수.
1942년 전북 순창에서 8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임씨는 이리 남성중·고를 졸업했다.
그는 학창 시절부터 노래를 ‘허벌나게’ 잘했다. 1963년 12월, 수도육군병원에 복무 중이던
이등병 시절 그는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문화방송 주최 ‘톱싱거대회’
연말결선에 군복을 입은 채로 출전했다. 심사위원 중 한 사람이 작곡가 황문평(黃文平)씨
였다.

그는 현인의 ‘꿈이여 다시 한번’을 불렀지만 입상하지는 못했다.
그는 얼마 뒤 황문평씨를 찾아간다. “중학교 다닐 때부터 가수가 되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습니다. 고향 순창에 계신 어머니께서 막둥이가
가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시겠다고
매일 아침 저녁으로 정한수 떠놓고 빌고 있습니다. 황 선생님,
제발 가수가 되게 지도해 주십시오.”

황문평은 그를 기억하고 있었고 그 자리에서 명함 두 장을 꺼내 뒷면에 간단한 메모를 한다.
명함 한 장은 작곡가 계수남 음악학원장에게, 다른 한 장은 수도육군병원장에게 각각 전하는
메모가 적혀 있었다.
수도육군병원장에게 보내는 메모에는 ‘임종수 이등병이 근무 후 노래를 배울 수 있게 배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는 숭인동 동대문실내스케이트장 옆에 있던 계수남음악학원을 찾아갔다.
계수남은 그의 노래를 들어보고는 “군인이 무슨 돈이 있느냐”며 “장학생으로 와서 음악
공부를 하라”고 말한다.

그때가 1965년 11월. 서울에 거처가 없던 그는 계수남음악학원에서 숙식을 해결했다.
밤이면 철제 책상 두 개를 나란히 붙여놓고 그 위에서 잠을 잤고 밥은 학원 옥상에서
석유풍로로 끓여먹었다.
임종수는 가수로 데뷔하기 위해 예명도 지었다. 임시원.

신인가수 임시원은 남상규, 오기택 등 함께 시민회관 무대에 서기도 했다.
1967년 그는 마침내 작곡가 나화랑 선생에게서 노래를 받아 취입한다. ‘호반의 등불’이었다.
꿈만 같은 가수 데뷔였다. 일주일 동안 그는 자신의 노래를 수십 번 반복해서 들었다.
그리곤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내 노래를 취입해서 듣고 보니 음색에 개성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한 당시는 팝송이 물밀듯이 들어올 때라 내 창법이 시대의 흐름에 맞지도
않았습니다.
돈도 없으니 이 바닥에서 버틸 방법도 없었고 또 내 얼굴이 TV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가수를 스스로 포기했습니다.”  

그는 나화랑 선생을 찾아가 ‘가수를 그만두겠다’고 말한다. 나화랑 선생은 그에게
 “정말 현명한 판단을 했다”면서 “노래를 잘하는 것으로 하면 너는 가수가 되고도 남는다”
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나화랑 선생은 그가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제안을 한다.

“너 오늘부터 작곡을 해라. 니가 생각하고 있는 멜로디를 악보에 적을 수 있느냐?”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나화랑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1주일 뒤에 노래를 써가지고 와봐라”.
작곡법을 배워본 일이 없던 그는 혼자서 머리를 쥐어짜며 곡을 썼다.
‘돌아가주마’라는 제목이었다.
나화랑 선생은 ‘돌아가주마’를 피아노로 쳐보고는 임종수
에게 말했다.
“처음 작곡해본 사람이 이런 곡을 쓸 수가 없다. 너는 반드시 작곡으로 성공한다

   68번째 곡 ‘차창에 어린 모습’ 들고 무작정 레코드사로

‘가수 임시원’에서 ‘작곡가 임종수’로 태어나는 순간. 그는 악상이 떠오를 때마다 곡을 썼다.
그러나 성공의 문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다. 그는 1970년 초 68번째 곡을 썼다.
‘차창에 어린 모습’. 노랫말은 서울에 올라와 무진 고생을 하는
자신의 처량한 삶을 빗대어
지었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단 한번 정을 준 그 사람을 홀로 두고서/
혼자만 몸을
실은 열차는 외로워/눈감아도 떠오르는 차장에 어린 모습….’

무명작곡가가 이름을 날리는 길은 단 한 가지. 유명 가수에게 곡을 줘 히트시키는 것이다.
당시 남자 인기가수는 남진·나훈아·박일남·남상규·안다성·오기택·최희준 등이었다.
임종수는 이들 중에서 ‘나훈아가 부르면 가장 잘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훈아가 전속해 있는 오아시스레코드사를 무작정 찾아온 것이다.

그는 2주일 동안 계속 같은 시간에 사무실을 찾아가 결국 손진석 사장을 만나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는 “나훈아에게 주고 싶은 곡이 두 개 있으니 나훈아를 만나게 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손사장에게서 돌아온 대답은  “나훈아가 언제 오는지 우리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3개월 ‘뻗치기’… 나훈아 만나자 “딱 5분만…”

그는 또다시 뻗치기 작전에 들어갈 수밖에.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 직원처럼  오전 9시쯤에 출근해 오후 4~5시까지
사무실을 지켰다. 그러기를 두 달여. 오전 11시쯤이었다. 사무실이 갑자기 왁자해졌다.

나훈아의 등장. 손 사장은 사장실 문을 열고 나와 “훈아 왔노”라며 반갑게 맞았다.
나훈아는
막 영화촬영을 끝내고 오는 길이라고 했다.
모자부터 부츠까지 전부 가죽제품을 걸치고 짙은 선글라스를 쓴, 톱스타의 모습이었다.

나훈아를 실물로 본 게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는 사장 방에 들어간 나훈아가 나오기만을 초조하게 기다렸다.
11시40분, 나훈아가 사장실을 나와 레코드사 현관문을 밀고 나가려는 찰나.
그는 가슴이 떨렸다.
이 기회를 놓치면…. 그는 벌떡 일어나 뒤에서 나훈아의 어깨를 잡았다.

“와예?”
나훈아의 첫 반응이었다. 그는 준비한 말을 속사포처럼 쏟아부었다.
“저는 무명 작곡가 임종수라고 하는데, 나훈아님을 만나려고 3개월 동안 기다렸습니다.
나훈아님께 주고 싶은 곡이 있습니다. 잠깐이면 됩니다.
2절까지 부르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니

두 곡을 1절씩만 부르겠습니다. 그러면 5분이면 충분합니다. 딱 5분만 시간을 내주십시오.” ‘딱 5분만’이라는 말에 나훈아는 마음이 흔들렸다.
나훈아는 그를 따라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피아노를 연주하며 노래를 시작했다. “떠돌다 머무는
낯선 타향에~”. 등 뒤에 서있던 나훈아가 앞으로 와 그의 얼굴을 쓱 쳐다보았다.

“임 선생님, 지보다 더 노래를 잘하시네예. 한 번만 더 해주이소.”
임종수는 다시 1절을 불렀다. 그러자 나훈아는 “한 번만 더 해주이소”라고 말했다.
노래를 세 번 듣고 난 나훈아는
“제가 한번 따라해 보겠심더”라며 노래를 따라 불렀다.


임종수는 전율을 느꼈다.
‘세 번 듣고 어떻게 저렇게 잘할 수 있을까’. 나훈아는 그 자리에서 악보에 사인을 했다.
취입하겠다는 뜻이었다. ‘그 사람을 버린 죄로’ 역시 나훈아의 낙점을 받았다.

우여곡절 끝 나훈아 취입… “불건전하다” 방송불가
1970년 3월 9일 나훈아가 노래를 취입했다. 그 다음날 레코드사를 찾아가니
 ‘차장에 어린 모습’이 타이틀곡으로 편집되었다는 소문이 쫙 퍼졌다.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동료 작곡가와 사무실 직원들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다. 임종수의 인생에도 마침내 해 뜰 날이 있구나, 라고 그는 생각했다.

하지만 5월 초 나훈아 음반이 나왔을 때는 ‘차창에 어린 모습’은 타이틀 곡이 아닌 세 번째
곡으로 밀려나 있었다.
기성작곡가들의 반발, 전속금 문제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해 레코드사
측이 취한 조치였다.
그는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새 앨범의 경우 타이틀곡만 방송을 타는
경향이 있을 때였지만
나훈아가 불렀으니 세 번째 곡도 주목을 받겠지 하고 초초하게
기다렸다.

그런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가사가 건전하지 못해 방송불가 판정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노랫말이 정부의 국민의식
개혁 운동과 배치된다는 설명이었다.
당시만 해도 모든 앨범에 마지막 곡으로 이른바 건전
가요가 하나씩 들어가던 때였다.
권력이 장발과 미니스커트까지 단속하던 시대 분위기
였으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렇게 ‘차창에 어린 모습’은 방송 한번 못 탄 채 사라지는 비운(悲運)의 신세가 되었다.

   2년 만에 가사 고쳐 ‘고향역’으로 재취입 대히트

임종수는 여전히 무명작곡가로 남아있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렀다. 1971년 12월 말 그는
오아시스레코드사에 들렀다가 나훈아를 우연히 다시 만났다. 
나훈아가 뜻밖의 제안을 했다.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이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 되었으니
슬픈 가사를
띠고(‘떼고’의 사투리) 건전하게 고쳐주이소. 리듬도 트로트에서
고고로 바꿔 주시고예. 고고로 바꾸면 경쾌하게 들리지 않겠어예.”

임종수는 제목, 가사, 리듬을 바꾸는 문제를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건전한 내용’을 놓고 여러 날을 고민했다.
불현듯 중학교 2학년 때 황등역에서 이리역까지
통학하던 일이 생각났다.

“익산군 삼기면 형님 집에서 산길을 넘어 황등역으로 가 통학 열차를 타곤 했어요.
아침밥을 해먹고 이십리 산길을 넘어 열차 시간에 맞춰 가는 게 고통의 연속이었죠.
뛰다시피 해서 겨우 열차에 타면 발판에 걸터앉아 이리역에 도착할 때까지 숨을 몰아쉬곤
했어요.
그때 기찻길 옆에 핀 코스모스를 보면서 고향의 어머니가 생각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릅니다.

일단 주제를 ‘고향역’으로 하자 가사는 술술 풀려나갔죠.”
1972년 2월 8일, 나훈아는 ‘고향역’을 취입했는데, 이번에도 ‘고향역’은 타이틀곡이 아니었다.
‘고향역’은 또다시 주목 받지 못했다.

행운의 여신은 끝까지 임종수에게 손짓을 하지 않나 싶던 순간에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
발생한다.
나훈아가 전격적으로 지구레코드사로 전속사를 옮겨버린 것이다.
지구레코드사는 나훈아의 ‘녹슬은 기찻길’을 내놓았다. 
  
전국 방송국 PD들에게 긴급 설문을 돌렸다. 나훈아의 앨범 중 타이틀곡을 제외한 알려지지
않은 곡 중 ‘베스트 10’을 골라달라는 내용이었다.

베스트 10 중 1위가 ‘고향역’이었다.
레코드사 측은
‘고향역’을 타이틀 곡으로 다시 앨범을 내놓았고
9월이 되자 전국은 ‘고향역’으로 뒤덮여버렸다. 

산업화로 도시로의 인구이동이 심화되고 있던 상황에서 고향을 떠난 이들의 마음을
뒤흔든 것이다. ‘임종수 시대’도 코스모스와 함께 활짝 피었다. 1972년 이후 코스모스
피는 계절이 오면 전국에서
‘고향역’이 흘러나온다.


7월14일... Good Luc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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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석 2010.07.14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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