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株主자본주의' 는 죽었다(5)...아내가 먼저 알아야 할 남편 건강법

2011. 11. 12. 20:03화석·청천리님 방

 

'株主자본주의' 는 죽었다(5)...아내가 먼저 알아야 할 남편 건강법

2010.08.27 07:07 | 님들의 휴게실 | 화석

http://kr.blog.yahoo.com/goran5006/2292 

 

'분석·직관 중 양자택일' 사고론 실패... 두가지 방식 통합 '디자인 씽킹'하라


   로저 마틴 교수는 창의성과 혁신 분야에서도 많은 연구를 해왔다.
   저서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 ≪디자인 씽킹≫도 그 중 하나다.

   지난해 내놓은 ≪디자인 씽킹≫에선 기업이 분석적 사고에 기반을 둔 완벽한 숙련
   과 직관적 사고에 근거한 창조성을 조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분석이나 직관 중
   어느
한쪽을 제거해야만 하는 양자택일의 선택이 아니라 두 가지 사고 방식을
   조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 비에 젖은 녹두꽃... 강화도님>
     

 

 

 



   이런 통합적인 사고 방식을 그는 '디자인 씽킹(design thinking·디자인적 사고)'
   이라고 부른다. 그는 올해 초 비즈니스위크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디자이너 27인'에 포함되기도 했다. 디자인 경험은 전혀 없지만 디자인 씽킹 개념을
   발전시킨 '비즈니스의 디자이너'로서 평가를 받은 것이다.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의 원제는 '상반되는 마인드(opposable mind)'입니다.
     이 제목은 엄지손가락을 보면서 만든 것이라고 했죠.


  "엄지손가락을 '상반되는 엄지(opposable thumb)'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엄지손가락이 나머지 네 손가락과 마주보며 긴장을 일으키기 때문이죠.
   우리가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은 바로 엄지손가락이 마주보며 펜을 쥘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식으로 마주보는 엄지손가락의 존재로 많은 유용한 일을 할 수 있습니다.
  '상반되는 마인드'는 여기서 은유된 것입니다. 대립하는 아이디어를 용인함으로써
   여기서 생기는 긴장으로 유용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공한 리더들을 연구하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성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아이디어들이 바로 반대의 생각을 포괄할 수 있는 마인드에서 이뤄졌다는 것이죠.
   이론적인 것이 아니라 경험적인 발견이었습니다."

     

 

 

 

 



 ―≪생각이 차이를 만든다≫를 읽은 독자들이 ≪디자인 씽킹≫을 읽음으로서 어떤
   것을 얻어가길 의도했나요.


  "앞의 책이 개인적 차원에서 설명한 것이라면, 뒤의 책은 이를 조직적 차원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돕기를 원했습니다. 신뢰성(reliability)과 활용(exploitation)에
   치우친 조직이 타당성(validity)과 탐색(exploration)에도 집중하도록 할 수 있다
   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예를 들어 여론조사로 따지면 누가 당선 확률이 높은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 타당성
  이고, 여론조사를 했을 때 95% 신뢰수준에 ±5% 오차가 나오도록 하는 것이 신뢰
  성입니다. 신뢰성은 기존에 있는 기술을 더 가다듬는 것이고, 타당성은 새로운
  아이디어로 이동하는 것을 도와주죠. 사업에 적용하면 기업가는 보통 전자이고,
  디자이너는 후자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둘 다가 필요합니다."

 ―'디자인 씽킹'을 위해선 근본적으로 조직 형태가 변화되어야 하지 않나요.

  "그럴 것입니다. 과거처럼 상하의 수직적 구조이거나 경계가 분명한 조직을 유지
   하는 건 갈수록 힘들어집니다. 오픈 이노베이션(open innovation)과 협력이 더
   많이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 탱자.. 강화도님>
     

 

 

 

 



   이럴 땐 애플처럼 실패를 용인하는 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스티브
   잡스는 천재이고, 실수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돌이켜 보면 잡스는 어마어마한 실수를 해왔습니다.
   뉴튼(1993년에 나온 최초의 PDA), G4 큐브(데스크톱 PC), 애플TV 모두 실수의
   연속이었죠. 하지만 놀라운 성공을 거두지 않았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정상에 오른 기업들은 결코 이런 실수가 없어야 정상에 오른다고
   생각하는데 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인생은 신비하고, 알 수 없으며 확실하지 않기 때문에 실패라고 함부로 규정해서는
   안됩니다. 가령 뉴튼이 완전히 잘못된 아이디어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시대를 너무 앞섰던 것 뿐입니다."



아내가 먼저 알아야 할 남편 건강법... 속 쓰리다면 위·십이지궤양 의심해야


     “아이고 속이야.” 

     

   많은 아내가 남편의 이런 신음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맞는다. 맵고 짠 음식을 즐겨 먹는 데다
   술과 담배, 스트레스에 노출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속이 편할 리 없다. 속이 불편한
   이유는 많겠지만 십중팔구 위나 십이지장 쪽에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크다.

   위나 십이지장의 안쪽 점막은 강한 산성인 위산이나 소화 효소를 포함한 위액에 노출되어
   있지만 자신의 위액에 의해 다치지 않는 방어구조를 갖추고 있다. 점막 세포를 보호하는
   물질이 계속 생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나쁜 식생활 습관과 세균 감염에
   의해 방어구조가 무너지면 점막이 상처를 입게 된다.

   이 상처를 통해 위액의 공격을 계속 받게 되면 조직의 일부가 없어지는 게 궤양이다.
   통증이나 불쾌한 증상을 느끼는 부위가 위면 위궤양, 십이지장 쪽이면 십이지궤양이 되는
   데, 그 부위에서 피가 나와 토혈이나 하혈, 천공(구멍이 생기는 것)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위·십이지궤양을 일으키는 3대 원인으로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감염, 비스테로이드성
   항염증약(NSAID), 스트레스를 꼽는다. 이 중 가장 많은 것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감염
   이다. 스트레스는 그 자체가 위나 십이지궤양을 일으키는 경우는 많지 않지만 다른 원인이
   있을 때 병을 가속화할 수 있다.
                                                 < 직박구리... 강화도님>
     

 

 

 

 



   과거에는 강한 산성의 위 안에서는 세균이 생식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위 점막 안에도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라는 세균이 존재하며,

   위궤양 환자의 70~80%, 십이지궤양 환자의 90% 이상이 이 세균에 감염된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 위궤양과 십이지궤양을 일으키는 구조는 다르다.

   먼저
위궤양의 경우를 보면,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 위 안의 요소(尿素)로부터 암모니아
   를 만들어 위산을 중화함으로써 강한 산성의 위 안에 정착하게 된다.
   이 암모니아가 위 점막을 다치게 한다. 또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감염에 의해 위 점막에
   유해한 활성 산소가 다량 생성되면 점막에 문제가 생기게 된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자체가 내는 독소에 의해서도 위 점막이 손상될 수도 있다.

       

 

 

 

 



  상복부에 통증 지속되면 검사 받아야

   이에 비해
   십이지궤양은 위산 분비가 많은 사람에게 주로 생긴다. 위산 분비가 많아지면
   십이지장에 위의 점막이 형성되고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 십이지장으로 흘러나오면서
   이 점막에 들러붙어 상처를 입힌다. 위 점막에 비해 산에 대한 저항력이 약한 십이지장에
   위산이 흘러 들어오면서 궤양을 유발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에 감염된 사람 모두에게 위· 십이지궤양이 생기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궤양이 생기는 경우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감염자의 2~3%에 불과하다.

   위·십이지궤양을 일으키는
두 번째 원인은 해열, 진통, 염증을 억제하기 위해 사용하는
   NSAID이다. 이 약 때문에 생기는 위·십이지궤양의 특징은 통증을 별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
   에서 진행되어 갑자기 토혈이나 하혈을 일으킨다.

   치료 목적으로 비스테로이드성항염증약을 장기간 복용하고 있는 환자는 주치의와 상의해
   소화기궤양에 대한 정기적인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뇌졸중이나 심근경색의 위험이 있는 사람은 예방 차원에서
저용량 아스피린을 장기간 복용
   하는 경우가 있다. 비록 소량이지만 아스피린도 비스테로이드성항염증약의 일종이기 때문
   에 위나 십이지궤양을 늘 조심해야 한다.
                                                           < 해바라기... 고락산성님>
     

 

 

 

 



   위나 십이지장 등의 내장 기능은 자율신경에 의해 조절되고 있다. 강한 육체적 또는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으면 자율신경의 기능이 흐트러져 점막의 혈류가 나빠지고 다치기 쉬운 상태
   가 되어 궤양을 일으킨다.


   1995년 일본에서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피해를 본 지역의 위·십이지궤양
   환자를 조사했는데, 피해가 큰 만큼 궤양의 정도도 악화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적도 있다.
   누구나 갑자기 강한 스트레스에 노출되었을 때 식욕이 없어지고 소화가 안 되는 느낌을
   경험했을 것이다.

  
위·십이지궤양은 문진, 촉진, 조영제를 마시고 X선 촬영을 하는 바륨조영검사, 내시경 검사
   등을 통해 진단한다. 위·십이지궤양이
의심되는 환자는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 감염 여부를
   확인하기 위한 검사를 받아야 한다.

   궤양을 확인하기 위한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가느다란 관에 초소형 카메라가 붙은 내시경을
   입이나 코로 삽입해 모니터로 상태를 보는 내시경 검사다.

   이 검사를 통해 궤양의 진행 정도를 확인하고 암이나 다른 병이 아닌지 구별한다.
   그뿐만 아니라 암 검사를 위해 조직을 채취하거나 출혈을 멈추게 하는 처치 등을 실시하기
   도 한다. 채취하는 조직의 크기는 1㎜ 정도에 불과하며 그 과정에서 통증은 느껴지지
   않는다.
                                                              < 능소화... 고락산성님>
    

 

 

 

 


   상복부나 명치 쪽에 지속적으로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의사와 상담해 위·십이지궤양 검사를
   받는 것이 좋다. 자각증상이 느껴지는데도 속풀이 해장에만 의존하는 사람은 병을 키울 수
   있다. 식사를 한 후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위궤양,
공복 시 통증을 느끼는 사람은 십이지궤
   양일 가능성이 크다.


   위궤양일 경우 위로 들어온 음식이 궤양을 자극해 통증을 유발한다. 이에 비해 십이지궤양
   은 위산이 궤양을 자극해 통증을 일으키기 때문에 공복 시에 자각증상이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개중에는 궤양이 있어도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환자도 있어 통증만으로 궤양의
   정도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위·십이지궤양 환자는 가슴 한가운데가 불타는 듯이 아픈 불쾌감을 느끼거나 시큼한 액체가
   역류되어 신트림이 나오는 증상이 종종 발생한다. 위에서 십이지장으로 이어지는 유문
   (幽門)이 좁아져 위에 장시간 음식이 머물기 때문에 식도로 위산이 역류하는 것이다.

   가스가 많이 생기고 장의 운동이 둔해져 복부 팽만감이 느껴지며, 식욕부진과 구토 증상이
   있는 것도 위·십이지궤양 환자의 특징이다.


     

 

 

 

 



   제균치료가 우선

   궤양 쪽에 출혈이 있는 경우에는 내시경을 통해 지혈제를 주사하거나 레이저로 지지는
   지혈치료를 한다. 출혈이 없는 경우에는 약물로도 충분한 치료 효과를 볼 수 있다.
   만일 비스테로이드성항염증약을 복용하고 있는 환자라면 복용을 중지해야 한다.
   헬리코박터 파이로리균이 발견되었다면 제균치료가 우선이다.

  
   속이 쓰릴 때 우유를 마시면 일시적으로는 편해지는 느낌이 들지만 나중에는 칼슘에 의해
   위산 분비가 늘어나기 때문에 차라리 물을 마시는 편이 낫다. 지나치게 뜨겁거나 찬 음식,
   신맛이 강한 식품, 염분이 많은 식품, 고추·후추·카레·겨자 등 위산 분비와 위 운동을 촉진
   시키는 강한 항신료 섭취도 줄여야 한다.

   밥은 규칙적으로 하루 3~5회에 나눠 조금씩 먹어야 위에 주는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위·십이지궤양 환자는 철분이나 비타민 B12의 흡수가 부족하고, 특히 급성 위염의 경우에는
   위벽 출혈로 빈혈이 생길 수 있기 때문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 간, 살코기, 녹색채소, 통곡식,
   달걀 노른자를 섭취하길 권한다.

  
신선한 양배추즙과 보리밥을 즐겨 먹으면 위·십이지궤양을 예방하는 데 큰 도움이 된다.



눈물젖은 두만강 - 김정구

- 1970년대... 동네에서 집들이 하면 얼큰히 취하면 젓가락 두드리며 18번으로 먼저
  올랐던 이 곡! 1980년대 후반이 되면서 노래방가도 꼭 한번은 부른 이 곡!

  누군가 말미에...
 "두만강만 강이냐? 낙동강도 강이다. 낙동~강 강바~람~~에 치마폭을 스치~며"
  그러다 "낙동강만 강이냐? 소양강도 강이다. 해저문 소~양강에..."
  그러면 "트로트만 강이야? 금강도 강이다. 금강에 살으리랏다. 운무 데리고..."
  이렇게 가곡도 한편 부르곤 했습니다.

  이제 시국이 시국이니만큼... 29일은 한일병합 100년입니다. 북한 두만강의
  탈북자 사연들도 가슴 아픈 이 시점에 다시한번 불러 봅니다.


                              눈물젖은 두만강 - 김정구

                    

                                    1938년 작사 김용호 /작곡 이시우

               

 

 

 

  1.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젖는 뱃사공
흘러간 그 옛날에 내 님을 싣고
떠나간 그 배는 어데로 갔소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2.강물도 달밤이면 목메어 우는데
님 잃은 이 사람도 한숨을 지니
떠나간 그 님이 보고 싶구려
그리운 내 님이여 그리운 내 님이여
언제나 오려나.



    

눈물젖은 두만강♪의 탄생이야기는 이렇습니다.

   < 두만강 건너 북한의 남양시 풍경 >



     희로애락을 노래한 국민가수, '서울 광상곡'에 장안이 발칵

   일제 강점기 하인 1930~40년대에 춤과 코믹한 몸 동작을 곁들인 김정구의 노래와 무대는
   파격이었다. 대부분 가수들이 어두운 노래만을 불렀던 당시, 여자도 아닌 남자 가수가 코믹
   한 대화식 노래(만담)에 춤까지 춘다는 것은 상상을 할 수 없던 시기였다.

   그만큼 ‘ 왕서방 연서', ‘ 앵화폭풍' 등 김정구의 풍자적인 노래는 재미있었고 흥겨웠다.

   오락만이 아닌 민족 애환을 담은 ‘ 눈물 젖은 두만강', ‘ 눈물의 국경' 등 서정가요도 잊지
   않았다.  이처럼 희노애락을 4색으로 표현하는 탁월한 노래와 모범적인 생활 덕에 그는 
   국민 가수 1호로 공인됐다.


    

 

 

 



   그는 조그만 철공소를 운영했던 부친 김원길과 찬송가 솜씨가 특출했던 모친 김자혜의 
   3남 2녀 중 차남으로 함경남도 원산시 상동에서 1916년 7월 15일 태어났다. 재담에 능했던
   부친의 재질과 어머니의 노래 솜씨를 함께 이어 받았다.

   동방예술단에서 바이올린과 트럼펫을 연주했던 형은 작사, 작곡, 연주, 노래 실력을 겸비,
   국내 최초의 싱어 송라이터로 불릴만한 선구자였다. 형의 아내 정재덕도 30년대 중반까지
   '님이여' 등으로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

   누이 김안라는 동경 동양음대에서 유학을 하고 1933년부터 ‘ 이별의 포구', ‘ 달빛 어린
   바다' 등 수많은 히트곡을 불렀던 인기 가수였다. 이들 삼남매는 해방 후 김용환이 이끄는
   악극단에서 함께 활동을 했다. 막내 김정현도 일본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던 재원.

   당시 그의 동네에는 신카나리아, 이인근, 테너 이인범, 원산관현악단장 이흥열 등이 살고
   있었다. 물을 좋아했던 그는 어린 시절 동네친구들과 함께 송수원 해수욕장이나 명사십리
   백사장을 놀이터로 삼고 놀았다. 

    < 원산이 유명한 명사십리 해당화...강화도님 > 


   바닷가의 수많은 추억은 가수로서의 감성을 일깨워주는 고향이 되었다. 작곡자 손목인은
  ‘바다로 가자' 녹음을 끝낸 그를 끌어 안고 “이렇게 좋은 감정으로 노래하는 가수는 처음이다.
   너는 감정의 천재”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유년 시절부터 교회를 다녔던 그는 성가대원
   으로도 활동을 했다.

   미국인 선교사가 교장으로 있던 광명보통학교에 들어갔다.

   공부보다는 운동과 찬송가와 그리고 휘파람 잘 부르는 아이로 유명했던 그는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14살에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책방 점원 생활을 하며 YMCA에서 운영하는
   원산 기독교청년학원을 마쳤다.

   소년 시절, 그는 양치기, 물지게꾼, 행상, 신문배달원 등 온갖 일을 하며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도 모자라, 간장을 탄 찬물을 타먹기까지 했다. 그는 ‘ 음악천재'로 불린 엄격한 형에게
   회초리를 맞아 가며 음악이론과 바이얼린 주법을 배웠다. 16살 때, 형을 따라 대승관 극장에
   가 무성영화 음악을 대타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산 관현악단과 혼성합창단원으로도 활동하며 순수 음악인으로의 꿈을 불태웠다.
   17살 때 유학간 누이가 방학을 틈 타 집에 오자 4남매 가족노래 선교단을 구성해 금강산
   입구 온정리 교회등 해금강 일대를 순회하며 공연을 했다. 

                                              

 



   이때 후에 한양대 교수가 된 형 친구인 유학생 김소동이 김정구의 노래 재능을
   발견하고 가수로 나설 것을 권유했다.
순수 음악을 꿈꿨기에 망설였지만 형과 누이의
   충동으로 상경을 해 충무로에 위치한 신생레코드사 뉴 코리아 에 찾아갔다.

   찬송가 ‘ 돌아와 돌아와'와 미국민요 ‘ 메기의 추억'을 불러 오디션을 통과, 전속 1호 가수가
   되었다. 찬송가를 불러 대중가수가 되었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1933년 녹음 연습 중에 유랑
   극단의 상징적 존재인 남봉명의 부름을 받고 파고다 공원 앞 조선극장의 신파 연극 막간
   무대에 올랐다.

   무대복이 없어 학생복을 입고 만요 ‘ 서울 광상곡'을 불렀다. 서양 문화의 무분별한 모방을
   풍자한 이 노래는 장내는 발칵 뒤집어 놓으며 무려 다섯 번의 앙코르를 받았다.
   신인 가수 김정구는 음반 취입 전에 이미 장안의 화제가 되었다.

   당대의 최고 여배우 최선과 대화를 주고 받는 만요 ‘ 3번 통 아가씨'를 비롯해 ‘어머님의
   품으로' 등 2곡을 취입해 데뷔SP음반을 발표했다. 두 곡 모두 친형 김용환의 곡이었다.
   노래 가사가 인쇄된 전단지가 뿌려지고 종로와 을지로의 음반 가게에 벽보가 나붙고
   유성기판을 통해 그의 노래가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좋은 반응을 얻고 고향 원산으로 내려가 쉬고 있던 중 ok레코드 문예부장 김성흠이 찾아
   와 스카우트 제의를 해 다시 상경했다. 그는 제법 유명 가수가 되어 있었다. 월300원의
   거금을 벌며 철마다 3벌 이상의 양복을 맞춰 '양복이 제일 많은 장안의 멋쟁이'로 불렸다.


   OK레코드는 김정구 외에도 장세정, 송달협을 함께 스카웃 했고 서정 가요의 제왕 남인수도
   합류했다. 입사동기 장세정의 ‘ 연락선을 떠난다'와 함께 ‘ 항구의 선술집'을 발표했다.
   빅 히트가 터졌다. 전국의 주점에선 젓가락을 두드리며 그의 노래 ‘ 부어라 마시어라'를
   부르며 목청을 드높이는 청년들이 넘쳐 났다.

                     
    일제의 탄압에 입과 귀를 봉쇄 당한 젊은이들의 마음을 담은 ‘ 항구의 선술집'은 가수로의
    기반을 다져준 첫 히트곡이었다.  창경원 벚꽃가지마다 김정구의 사진을 주렁주렁 매단
    사진을 썼던 신보 '창경원 벚꽃'의 사진 홍보는 큰 화제가 되었다.

    1938년은 그에게 가장 중요한 해였다. 2월의 빅히트 곡 '왕서방 연서'는 그 서막이었다.
    이가 빠진 중국인 분장을 하고 바보 같은 제스처로 세태를 풍자했던 김정구는 최고 인기
    가수로 솟아 올랐다.

    대표곡이자 대중음악사상 최고의 명곡으로 손꼽히는 ‘ 눈물젖은 두만강'도 이 때 발표
    되었다.  12월에 발표한 생동감 넘치는 ‘ 바다의 교향시' 역시 주요 레퍼토리가 되었다.


    눈물젖은 두만강에 담은 민족의 애환과 독립의지

    국민가요 ‘ 눈물젖은 두만강’은 1935년 여름,
    악극단 예원좌의 일원으로 두만강 유역의 도문에 공연 갔던 작곡가 이시우가 만들었다.

    당시 여관에서 쉬고 있던 이시우는 먼길을 찾아 와 독립군 남편의 전사 소식을 접한
    어떤 여인의 통곡에 밤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무심하게 흐르는 두만강의 정경과 여인
    의 통곡에서 민족의 한을 느낀 그는 멜로디가 떠올랐다.

    공연 마지막 날, 소녀 가수 정성월에게 이 노래를 부르게 했다. 그리고 노래의 사연을 소개
    하자 공연장은 이내 눈물 바다를 이루었다. 일생의 역작을 작곡한 이시우는 이 노래를 정식
    음반으로 남기고 싶어 인기 가수 김정구를 찾아갔다.

              

 



    노래가 마음에 들었던 김정구는 작곡가 박시춘을 찾아가 음반 제작 허락을 받아 내고
    작곡가 김용호에게 부탁해 1절밖에 없던 노래를 3절까지 완성시켜 취입을 했다.
    노래가 발표되자 김정구는 무대에서 이 노래를 꼭 불러야 했을 정도로 반응이 대단했다.

    김정구는 최초의 음반사의 전속연주단인 OK 연주단과 함께 전국을 순회했다.
    1940년대에 들어서며 OK 악극단은 북경, 상해, 만주, 일본으로까지 활동 반경을 넓히는 
    한편 이름도 조선악극단으로 변경해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당시 멤버는 작곡 반주 박시춘ㆍ 손목인ㆍ김해송, 가수 남인수ㆍ고복수ㆍ김정구ㆍ
    송달협ㆍ이난영ㆍ장세정ㆍ백설희 등 가히 최강의 라인 업이었다.


    당시는 남인수와 김정구의 라이벌 시대. 두 사람의 공연 후에는 항상 장안의 기생 인력거
    가 길게 줄을 섰다. 김정구의 한달 수입은 당시 집 2채에 해당하는 거금 1,000원에 달했다.
    그가 출연했던 서울의 명치좌(명동 국립극장 전신)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은 입장권을
    사려는 관객들이 건물 둘레를 뱀이 또아리 틀 듯 휘감았다.

    그가 종로거리를 걸으면 거리가 마비되었을 지경이었다. 심지어 달리던 전차가 멈추기까지
    했다. 두만강 부근 공연 때, 일본 경찰에 잡혀 남편이 옥사해 소복을 입고 있던 한 여성 관객
    이 사연과 함께 노래를 듣고는 두만강에 투신 자살을 했다.

    이 사연이 알려지며 ‘ 눈물젖은 두만강’은 더욱 널리 불리워졌다.
    이에 일제는 ‘ 민족 의식을 고취시킨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라는 멍에를 씌웠다.
    평양 금천대좌공연 때는 ‘ 낙화삼천’을 노래하자  조선인 일본 경찰이
  “ 노래가 불온하다”며 경찰서로 끌고 가 사흘동안 고문을 했다.
 

               

 



    또한 ‘ 타향술집’에선 “ 술잔을 기울이며 외로이 우나니”라는 부분을 두고 “왜 외로이
    우느냐?”며 문제 삼기도 했다. 무대 장치 가운데 태극선이라도 그려지면 무조건 문제
    삼던 시절이었다. 동경 공연 때는 ‘ 유쾌한 봄소식’에서 “ 긴자의 버들이 넘실넘실”부분의
  “ 넘실넘실”을 일본말이 아닌 우리말로 부르자 감격에 겨운 유학생들이 무대위로 올라와
    그를 얼싸 안았다.

    그 때문에 경찰에 끌려 가 조사를 받았지만 그의 숙소에는 유학생들이 가져 온 꽃다발이
    넘쳐났다. 하지만 총독부의 강요에 견디지 못하고 전쟁을 독려하는 영화 ‘ 너와 나’에
    백마강의 뱃사공으로 출연해 주제가 ‘ 낙화삼천’을 부르는 수모도 겪었다.

         < 낙화삼천>
         

 



     그는 일본 패망 직전인 동경에 볼모로 잡혀있던 조선 영친왕(이은)과 방자여사를 위해
     열었던 아카사카 별궁 공연을 가장 잊지 못했다. 1943년, 27살의 청년 김정구는 춘천
     처녀 조남진과 결혼을 해 2남 4녀를 두었다.

     해방 후에도 영화 ‘ 눈물젖은 두만강’에 출연해 꺼지지 않는 인기를 이어 갔다. 하지만 }
     형 용환과 함께 결성한 태평양가극단의 지방순회공연이 실패해 모든 재산을 날리는 좌절
     도 겪었다.  정부 수립에 이어 6ㆍ25 전쟁이 터지고 9ㆍ28 수복이 가까워 오던 어느 날,
     그의 집에 날아든 두 발의 포탄으로 아버지를 잃었다.

     1ㆍ4후퇴 때는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풀 빵 장수를 해 연명을 했다. 정치적 격변기를
     거치며 외국 팝송과 현인, 박재홍 등 후배들에 밀려 입지를 잃어 갔다. 1961년, 한일관계
     가 새로운 장을 맞기 직전에 재일 동포 위문 공연을 떠나 동경을 비롯해 6개 도시 순회 
     공연을 열었다.

    ‘눈물젖은 두만강’, ‘ 왕서방 연서’, ‘ 바다의 교향시’ 등 700여 곡을 남긴 그는  1967년 서울
     시장공로상, 73년 국방부장관상에 이어 1980년 대중가수로서는 최초로 보관문화훈장을
     수여 받았다. 1976년 2월, 퍼시픽호텔 홀리데이인 서울에서 열흘동안 대중가요 사상 최초
     의 회갑 기념 공연을 열어 주목을 받았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밤무대는 물론 85년 남북 이산가족 고향방문단의 일원으로서 평양
    공연, 87년 미주 해외교포 위문 공연 등에 참여했다. 87년 KBS 가요대상 원로가수상을
    수상한 데 이어, 90년 MBC TV ‘ 토요일 토요일은 胄탓?에서는 그의 55년 가요인생에
    대해 특집방송을 했다.

    하지만 92년 노인성 치매로 “ 이제는 눈물젖은 두만강 가사도 깜빡 깜빡한다”며
    요양차 미국으로 건너갔다.
6년 후, 병마를 이겨 내지 못하고 98년 9월 25일 향년 82세로
    LA에서 세상을 등졌다.

    2000년 8월, 가수분과위는 두만강변에 연변조선족전통문화연구센터를 세우고, 도문성
    옛 두만강나루터에는 ‘ 눈물 젖은 두만강’ 노래비 건립을 추진했다. 한국 대중음악의 개화기
    부터 60여년 동안 활동을 이어오며 산증인 역할을 했던 국민가수 김정구.

    고 현인도  “ 스타 이전에 인간적으로 후배들의 존경을 받으셨고 노래에 앞서 항상 바르고
    검소한 생활로 후배들의 귀감이 되었다”고 생전에 회고했었다. 

     

 



    그의 노래 ‘ 눈물 젖은 두만강’'은
    한국 대중 음악사상 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곡으로 불멸의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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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석 2010.08.27  07: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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