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채(山菜)의 변(辯)

2011. 3. 9. 13:51나의 난 단상집

 우리 님들 뭔가 자기가 좋아서 하는 것에는 다 그럴듯한 이유가 있기 마련입니다.
고란초도 채란을 위한 산행을 다니면서 그 이유를 '산채의 변'이란 제목을 붙이고서
한 번 써보았는데, 이게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럼 우리 님들도 한 번 감상해보세요.



                                   
                                   

                                                       -고란초의 자작 컴퓨터 그림집에 있는 '산'입니다.-     




                산채(山菜)의 변(辯)



 산에 간다. 만사를 제처 놓고 산으로 간다.

 산행의 목적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한 마디로 뭐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가야만이 직성이 풀린다.

그저 맹목적인 산행을 즐기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몇 가지 목적을 가지고 그 무엇을 얻기 위해 산행을 하는 사람도 있다. 나는 어디에 속할 것인가?

 과거엔 등산이라면 담을 쌓던 나였건만 난을 알고부터는 어느 산이든 가고만 싶다. 그런데 나의 산행은 자기 몸도 못 가눌 정도의 무거운 배낭을 메고, 생명을 밧줄에 맡기며 모험을 즐기는 그런 산악인이나 등산가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저 가벼운 옷차림으로 산행에 필요한 최소한의 간단한 장비만 지닌 체 산을 오르는 것이다.

 굳이 산행의 목적을 밝힐 필요는 없지만 내가 추구하고 느끼고자 하는 것은 다음 4가지와 같다.

 첫째, 가장 중요한 것은 난을 얻기 위한 것이다.

 난을 구하는 방법도 여러 가지 있는 것으로 안다. 돈으로 산다면 무엇이든지 갖고 싶은 것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직장이나 사회에서 지위가 높거나 명성이 있으면 쉽사리 선물로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이것도 저것도 뭐하면 직접 자신의 몸으로 때워 산에서 구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이러한 방법 모두가 나에겐 해당될 수도 있는데, 문제는 너무 쉽사리 얻거나 구한 것은 그만큼 정성을 쏟을 수 없고 무가치하게만 느껴지는데 있다. 쉽게 번 돈이나 거저 얻은 돈은 돈 자체가 귀한 줄 알고 있지만 그 가치를 모르고 쉽게 써버리거나 가치 없이 사용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그렇지만 애써 모은 돈이나 자기 노동의 대가로 받는 돈은 아껴 쓰게 되고 더욱 애착을 느끼게 된다.

 난도 마찬가지다. 돈을 주고 쉽사리 구한 것이나 남에게서 얻은 것은 별다른 애착을 느끼지 못하나, 자기가 고생해서 직접 산채한 것에는 더욱 정성을 쏟게 된다.

 또한 사람은 자기 성취욕을 위해서 산다고 볼 수 있다. 뭔가를 이뤄낸다는 것, 자기 목적한 바를 성취한다는 것은 삶의 가치와도 연관된다. 자기 목적한 바를 이뤄내지 못한다면 결국 좌절 상태에 빠지게 된다. 즉, 세상 살 맛이 안 나는 것이다. 또한 자기가 존재할 가치가 없다고도 여기게 될 수도 있다. 그렇지만 하고자하는 것을 해냈을 때의 기쁨, 희열은 결국 삶의 희망이 되고 자기 존재 의식을 느끼게 되기도 한다.

 자기가 원하는 난, 자기가 꼭 갖고 싶고 필요로 하는 난을 찾아, 제아무리 험난하고 고생되는 산행이라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달려가는 것은 성취의 기쁨을 얻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다. 경험상 다른 어떤 것보다도 난의 경우 성취의 기쁨에 관한 정도가 지나칠 만큼 큰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희소가치가 있고 정말 갖고 싶은 것을 발견했을 때 그 기분은 직접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너무 좋아서, 너무나도 기뻐서 미칠 지경이라고 해야만 할까? 온 몸이 전율에 부르르 떨리며, 환희의 절정에 도달된 듯 한 마디로 말해 뿅 가게 되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 성취된다는 것은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10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는 없다라든가, 칠전팔기라든가 하는 말은 계속적으로 어떤 일이고 매달리다 보면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으로, 부지런히 산행을 한다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난은 자기 성취욕을 이룰 수 있는 대상 중에 뺄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은 난을 기르는 사람만이 알 수 있다. 난의 진가를 모르고 난을 잘 모르는 사람은 전혀 그 의미를 모를 수밖에 없다. 결국 자기 성취욕의 고취를 위해, 자기 소유물에 더욱 애정을 갖기 위해 난을 구하러 산으로 가는 것이다.

 둘째는 내 자신의 건강상의 이유이다.

 누구를 막론하고 이러한 이유는 핑계이지 이유가 될 수 없다고 하나 실제 실행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인적 없고 맑은 자연을 벗 삼아 세속을 떠나 자기가 가고 싶은 대로 원 없이 산행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신선이 된 기분이 될 것이다.

 즉, 복잡다단한 사회에서의 탈피와 자연과의 가까워짐은 정신건강에 지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람이 무념무상의 상태가 되려면 꼭 산에만 가야 하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지만, 경험으로 비추어보면 자연과 벗하며 혼자 즐거움을 맛보고 있는 경우에 자신도 모르게 무념무상에 빠지는 경우가 많았다.

 산속에서 돌아다니다보면 그런 것을 느끼는 사람이 많았기에 하는 말이다.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는 것은 정신적인 평온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삶의 활력소가 될 수도 있다.

 또한 산행은 육체적인 건강에 확실한 효과가 있다. 남이 시키지도 않은 것을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이라서, 피곤한 줄도 모른 체 쏘다니다보면 전신 운동이 되는 것이기에 육체적인 건강이 호전되는 것이다.

 운동도 자기가 하고 싶어서 해야만 자신에게 이롭다. 하기 싫은 운동을 몸을 생각한다고 억지로 해봤자, 금방 싫증을 느끼게 되고 건강상 별다른 도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자기가 하고 싶은 운동은 자기 스스로 결정해야만 한다. 남의 말을 듣고 그대로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직업이 의사라서 그런지 나에겐 운동이 여간 부족한 게 아니다. 어느 누구는 골프 이상 더 좋은 운동이 없다고 하며 나더러 골프를 하라고 수차에 걸쳐 권했지만, 나에겐 그 운동은 생리에 맞지 않는 것만 같다. 왠지 나에게는 거리감이 있는 운동만 같기도 하다.

 그런 이유에서 내가 좋아서 산행하는 것은 결국 정신적 육체적 건강에 분명히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나 또한 이런 생각에 동감하며 그 도움을 받고 있는 것을 피부로 실감하고 있다.

 셋째는 경제적인 이유이다.

 같은 일을 해도 보람이 없고 경제적 손실이 크다면 그 누가 그 일을 좋아하겠는가? 제아무리 돈이 많아 호의호식하는 사람이라도 불만이 많은 사람을 많이 볼 수 있다. 그들 중엔 타인의 눈총을 받는 자들도 있고,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자들도 있다.

 현대 사회는 경제적으로 점차 부유해져 가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유흥가가 계속 번창되고 있고, 퇴폐 향락업소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어서고 있으며, 돈을 많이 가지고 있어야만 사회에서 인정받는 것처럼 변하고 있고, 어렵사리 번 돈도 헤프게 사용하고 있는 것만 같다. 돈 많은 사람이 다시 그 돈을 사회에 환원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고, 오히려 돈을 물 뿌리듯 뿌려대며 자기 과시를 하고 잘났다고 으시대는 자들이 많다. 이건 한 마디로 말해 꼴불견이다.

 그렇지만 산행엔 이런 일은 거의 없다. 남을 의식하거나 남의 눈총을 받지도 않으며 필요 없이 돈을 낭비하는 일도 거의 없는 건전한 취미이다. 오직 자신에게 필요한 최소한의 물품만 구입하고 산에 오르기 때문에 경제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왕지사 돈도 별로 안 들고 남의 눈총을 받지 않는 일이라면 해도 무방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직업적으로 산에 오르기도 하지만, 그 사람들은 산채가 곧 돈벌이임으로 매일같이 산에 가는 경우도 있으나, 나의 경우완 전혀 차원이 다르다.

 채란하여 돈을 벌겠다고 작정하는 경우는 경제적인 도움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순수한 마음에서 자신이 선택해서 하는 산행은 돈을 떠나 자기 발전을 위해서는 꼭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나는 캔 난을 팔아 돈을 벌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고 있다. 오직 잘 키워보는 재미와 기르고 싶어 하는 난을 산행에서 구해 보고픈 마음 밖에는 없다.

 넷째는 인간사의 순리를 배우는데 도움이 된다.

 이건 사실 산행과는 무관할 수도 있지만 산으로부터 얻은 난을 키우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깨닫게 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엔 여러 가지가 있으나 특히 인내심을 기르는데 이점이 있다.

 꾸준한 산행만이 명품과의 만남이 있게 되므로 끝까지 인내심을 가지고 산행에 임해야만 한다. 어느 누구는 단 한 번 산행에서 월척을 했다지만, 그건 행운에 불과한 것일 뿐 그만큼 명품을 만날 기회가 자주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가고 또 가야만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것이다. 명품을 알현치 못했다고 도중하차하는 자는 결코 명품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뭔가를 꾸준히 한다는 것, 끝까지 노력한다는 것, 참고 기다린다는 것에는 고역이 따른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람의 성격상의 문제일 것으로 생각되지만 성미가 급하거나, 성질이 고약하고 날카로운 사람은 차분한 사람에 비하면 실수를 연발하거나 타인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기 쉽다.

 난을 기르는 일은 인내심이 없이는 할 수가 없다. 그만한 정성을 쏟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다리는 것도 필요하다. 난의 꽃을 피움에 있어서나, 새촉의 성장과정을 지켜보는 것에서 변화하는 것이 많기에, 그렇도록 끈질긴 노력을 해야만 하고, 좋은 품종으로 뒤바뀔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참으며 기다려야만 한다.

 성급하게 꽃대를 따서 벗겨보거나 화장토를 파본다고 꽃이 더 잘 피거나, 새촉이 잘 나오지는 않는다, 자연의 순리에 따라 그저 기대하면서 기다려야만 한다. 낚시도 인내심을 길러주는 좋은 취미라고 하지만 이건 단기간이 필요할 뿐이다. 그러나 난을 기름은 1년, 2년, 심한 경우는 5년 이상의 장기적인 인내심이 필요하다.

 생강근에서 나온 한 촉짜리 난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정말로 오랜 세월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는 한란 한 분의 꽃을 피우기 위해 7년 동안을 기다렸다고 한다. 결국 장기간동안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인내심을 길러주는 것이기에, 산행에서 채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일들을 각오해야만 하므로 자신도 모르게 인내심이 길러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외에도 난은 세상을 순리대로 살아가도록 하는 많은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러한 모든 이유에서 나는 난을 기르는 것이고, 열불 나게 산행을 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도 주말만 기다려진다.

 나의 산채에도 산채병이란 말이 나올 정도다. 산채를 못가는 날엔 어딘가 모르게 몸과 마음이 위축되어 있다. 어느 애란인은 얼마나 극심한 산채병에 걸렸는지 죽어도 난을 찾아 헤매다 산에서 죽고 싶고, 이름 없는 어느 산마루에서 죽어 화석이 된다고 해도 여한이 없을 것이리라고 말하고 있다. 산채가 바로 삶의 희망이요 그 자체라고도 하고 있다. 어느 때라도 가고 싶은 대로 산채나 갔으면 하는 것이 산채꾼들의 소원이리라.

 그러나 이걸 그 누군가에 의해 못하게 된다면, 아니 할 수가 없다면 어찌될까? 이건 물어볼 것도 없이 삶을 포기하라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당사자는 삶의 의미를 느끼지도 못하리라.

 나의 경우는 그토록 심각한 것은 아니나 내가 좋아서, 내가 정말 하고 싶어서, 내가 스스로 원하여 즐거이 하는 산행과 채란을 어떤 물리적인 힘에 의해 못할지도 모르는 위기에 처해있다. 내가 즐겨 배양하는 것도 포기해야 될 위험에 직면해있는 것이다. 나의 정신과 육체적 건강을 걱정해야 되고, 경제적 손실을 가져와야 하며, 그 누구를 벗하며 의지해야할 대상을 잃어야만 하니 정말이지 미칠 노릇이다.

 이젠 어찌해야만 하나?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까?

 나는 이 질문을 내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가장 적절한 해답을 스스로 찾아야만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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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님들 잘 감상하셨나요?
저의 산채의 변이 말이 되나요?
우리 님들도 자기가 좋아서 하는 일에 어떤 이유와 목적이 있는지
한 번쯤 생각해보시는 것도 좋을 것만 같습니다.
 우리 님들, 즐겁고 알 찬 주말 되시길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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