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영감의 항렬(項列)

2011. 3. 1. 12:34나의 문학작품

 우리 님들 이름자 항렬 때문에 어려움을 겪진 않으셨는지요?
 지난 날 어느 세무서에 근무하는 배 계장이란 분이 항렬 때문에 배영감이란 사람에게 된통 당했다가 멋지게 복수하는 작품입니다.
 이 글은 은사님의 산문집 내용을 극히 일부 참고하였음을 밝힙니다.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해보시기 바랍니다. 


                          

                                                    







 

                  배영감의 항렬(項列)




 “아따! 그 놈의 영감탱이 굉장도 하드구만. 눈코 뜰 새 없이 지껄여 재끼는데 어디 정신을 차릴 수가 있어야지.”

 아침에 세무서의 세금 징수원인 계원 한 사람이 나가면서 기어이 받아 오겠다고 장담하더니만 돌아와서는 풀이 죽어 한 마디 내뱉는 소리였다.

 이번 세금 징수에 있어서도 배 창수 계장 이하 전 직원이 출동하여 매일 같이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는 것이었으나, 납세 성적이 좋지 않은 이유를 살펴보자면 별스런 사유들이 많았다.

 돈이 없어서 받치지 못하는 안타까운 사정에는 분명 부과액이 과도하구나 싶은 딱한 경우도 적잖게 보아온 터였다. 그렇지만 가장 밉상스러운 것은 충분히 낼 수 있을 만한 푼수임에 틀림없고, 어느 모로 보나 적절한 액수임에도 불구하고 괜스레 비비적거리고 깡그리며 마감일을 늦추려드는 족속들이었다.

 이 세무서의 관내에서 세금 징수 때가 되면 항상 말썽쟁이는 S마을의 배영감이었다.

 그는 논도 꽤나 많은 마지기를 손수 지으며, 일꾼까지도 두어 명 부리고 있는 옴팍한 S마을에서는 여하 간에 둘도 없는 갑부였다. 촌부자가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돈이라면 한번 들어가면 되나올 줄 모르는 수전노 배영감임에는 틀림없는 일이었다.

 세무서 계원 중에서 누구건 한번 다녀와서는 머리를 설레설레 흔들며 진저리를 내는 바람에, 이번에도 이미 다섯 사람째 번갈아 다녀온 것이었으나 여전히 헛걸음이었다.

 허탕을 치고 돌아온 계원들의 푸념 섞인 넋두리 또한 가지각색이었다. 내력을 물어보면 별 것도 아닌데도 긴 담뱃대만 물고 앉아 바로 양반인 체 하며, 곧장 텃세만 부리려고 드는 데엔 정말 코웃음이 다 나올 판이었다.

 쉰 살도 체 못 되었다는 백수가 하얀 노인 티를 내는 데는 구리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도시 되어먹지 않은 것이 곱소리나 머리카락이니 대낮이면 망건 자국을 이마에다 억지로 내느라고 땀까지 뻘뻘 흘려대면서도, 망건을 쓴 채로 햇볕을 쪼이고 앉아있는 망측스러운 꼴을 동네 마을 사람들이 안 본 사람이 거의 없다더라, 유난히도 굵기만 한 상투엔 지금도 은동곳이니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바꿔서 낀다고 하더라, 등등 모두가 이런 따위 말이었다.

 배 계장은 ‘이제 여섯 번째에는 계장님이 직접 가보십시오.’하는 웃음 섞인 계원들의 권유뿐만 아니라, 솔깃한 호기심까지도 생겨 이 마을 저 마을, 이 집 저 집을 더터가면서 어느덧 배영감 집에 이르렀다.

 그런데 안채는 초가집이면서도 대문만은 기와로 올려댄 꼴이 처음부터 이상야릇한 감이 들었다.

 “실례합니다.”

 배 계장은 마당에 들어서서 으레껏 하는 인사를 내던졌다.

 “뉘시오?”

 궐자인 배영감은 미닫이를 반만 열고나서 얼굴만 삐쭉 내놓고 되묻는 것이었다.

 “네, 세무서에서 왔습니다. 배 창수라고 합니다.”

 배 계장의 대답에 다음에는 난데없이 본관을 묻고나서 배영감은 종씨라고 덥석대더니,

 “수자가 물가 수(洙)요?”

 “네, 그렇습니다.”

 그러자 배영감은 대뜸 언성을 높이며,

 “어허! 자네 어르신이 누군고?”

 하고 나서는 대뜸 말투부터 반말로 낮추더니만,

 “그래? 자넨 항렬로 봐서 내 증손 뻘이야.”

 하고는 잇따라 떠벌리기 시작했다. 막상 이야기만 들었지 처음 당하는 꼴이었는데, 영락없이 자네보고 자네라 하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라는 격이었다.

 그러더니만 곰방대를 들었다 놓았다, 담뱃불을 피웠다 껐다, 털어도 보았다, 별 짓이었다. 두 눈가의 주름살들이 모아지더니만 나중엔 얄궂은 호박풍잠이 한쪽으로 처져 비뚤어진 줄도 모르는 체, 그야말로 고장 난 스피커에서 큰 소리로만 들리는 약장수의 코먹은 소리에 못지않았다.

 ‘아, 아! 나는 약장수도 아무 것도 아니올씨다. 다만 이 약을 만드는 우리 제약회사를 널리 선전하고, 동시에 여러분이 방금 보셨다시피 이 약의 신통한 효과를 널리 여러분께 알려드리고자, 원래 정가는 천원도 넘는 것을 이번만은 특별 선전하기 위하야 정가의 십 분지 일 값인 단돈 백 원... , 여러 손님들의 자녀들이 잘 사먹는 밤과자 한 봉 값보다도 더 헐한 값 백 원, 단돈 백 원에 거저 나눠 드리려는 것이니 댁에 돌아가시면 이웃집 아저씨나 앞집 처녀에게도 빠짐없이 선전하여 주시기 바라는 바입니다. 자! 몇 봉 안 남았습니다. 먼저 가져가시는 사람이 임자입니다. 아! 저기 있는 애들은 저리 가거라. 가! 먼저 사시는 분이 제일 이익입니다.’

 낡아빠진 바이올린을 손에 들고서 네거리 한 모퉁이에서 솜씨 좋게 잘 해먹는 진짜 약장수의 수다쯤은 지금 배영감에게 비하면 정말 깨소금 같은 양념에 불과한 것이었다.

 창수는 그 자리에 빳빳이 선 채로 몇 번이나 입을 들먹이려다가 되오므려버리며 꼬박 별 꼴을 다 겪고 말았던 것이다. 도깨비에 홀린 얼빠진 사람처럼 머리가 흐리멍덩해진 창수는 어느덧 그 집 대문 턱을 넘으면서 흘끗 쳐다 본 문패의 끝자는 분명히 빛날 환(桓)짜였다.

 이제 시오리 길을 빈손으로 걸어야 할 일도 따분했거니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분통이 터질 노릇이었다. 응당 받으려 했던 세금은 커녕 말 한 마디 제대로 겨누어보지 못 했다는 것, 그리고 소위 손위 어른이니 반말을 들은 것쯤은 그래도 참을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 뵈도 서른의 고개를 훨씬 넘어 큰 놈이 초등학교 5학년에 다니는 버젓한 아버지가 난데없이 영감탱이에게서 증손이란 누명을 둘러 쓴 것만은 참기 힘든 모욕이었던 것이다. 원래 배 창수란 이름 자체가 장가 들 무렵에 집안에서 마음대로 개명한 것이었음을 새삼 다시 떠올려보는 배 계장이었다. 한참을 터벅거리며 걷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춘 창수는 주먹구구를 하듯 뭔가를 중얼거리고 나더니만 뛰다시피 배영감 집 안마당에 다시 들어섰다. 그리고는 냅다 한 마디 날려댔다.

 “영감님!”

 “어째 또 왔는가?”

 “오행을 따지자면 수생목, 목생화가 아닙니까?”

 “암, 그렇다 말다.”

 “그러고 보면 영감님이 제 손자뻘 되는 것이 더 당연하지 않습니까?”

 이렇게 시원스레 해치우고는 덥썩 집밖으로 나와 버렸다.

 “아니, 저런 천하에 고얀 놈 같으니라고. 문중에 없는 호로 개 쌍놈의 자식 봐라.”

 서슬이 퍼레진 배영감의 터질 듯한 목청소리를 똑똑히 들은 창수는 싱글벙글 휘파람을 불면서 걷는 꼬불꼬불한 논두렁길의 발걸음이 한결 더 거뜬하기만 하였다.


(주석)
       * 곱소리:
       코끼리의 꼬리털. 가늘고 부드러우며 망건, 탕건 따위를 만드는 데 쓴다.
        * 은동곳:
        1. 상투에 꽂는 은으로 만든 동곳.
        2. 은비녀의 북한어.
        * 풍잠:
         망건의 당 앞쪽에 꾸미는 물건.
         쇠뿔, 대모, 호박, 금패 같은 것으로 원산 모양을 만듬.
         갓모자가 뒤쪽으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느라고 꾸미는 것임. 원산이라고도 함.   


     .........................................
 우리 님들 즐겁게 감상하셨나요?
저도 항렬 때문에 당한 일화가 많습니다.
제가 언젠가 집수리 때문에 샤시기술자를 불렀었는데, 30대 초반 쯤 되어보이는 젊은 친구가 제 성과 이름을 묻더니만 그 친구 하는 말, 종씨인데 자기 조카뻘이 나와 같은 항렬이라고 하면서 말을 놓으려고 하더라구요. 정말 어처구니가 없더군요. 그래서 '내 큰 자식놈이 자네 나이네.' 했더니만 뒷통수를 뻑뻑 긁고 있습디다. ㅎㅎㅎ
  우리 님들 오늘도 즐거운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